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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유고(靑巖遺稿)

조선 중기의 학자 청암(靑巖) 이원승(李元承 : 1518-1572)의 시문집 1권을 새긴 목판으로, 권1의 본문을 새긴 1판이 남아 있다.
청암유고(靑巖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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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자
    이원승(李元承)(저)
    판심제
    靑巖遺稿
  • 기탁처
    영천이씨 농암종택
    서문
  • 발문
    판각시기
    1912년
  • 완본수
    3
    현존수
    1
  • 결락수
    2
인물정보
이원승(李元承) [중종 13년(1518) - 선조 5년(1572)]


본관은 영천(永川)으로, 초명(初名)은 이학수(李鶴壽)였고, 자는 운장(雲長), 호는 청암(靑巖)이다.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벽오(碧梧) 이문량(李文樑)과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 충의위(忠義衛) 이승손(李承孫)의 딸이다.

진성(眞城) 이만규(李晩煃)가 작성한 청암 이원승의 묘갈명(墓碣銘)에 의거하여, 그의 행적을 비교적 자세하게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이문량이 이승손의 딸과 혼인하여 원승을 낳은 것은 중종 13년(1518) 무인(戊寅)이었다. 청암은 어려서부터 기모(機謀)가 빼어나고, 세운 뜻이 맑고 원대하였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도 돈독하여 애일당(愛日堂)의 가법(家法)에 따라 부모를 극진히 모셨다 하였다. 일찍이 도산서원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배웠다.

명종 2년(1547)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였는데, 모친의 상(喪)에 슬퍼함이 법에 지나쳤다 하였다. 그 이후로 자신을 돌보는 데 소홀하고, 오직 조상의 제사를 모시고 곤궁한 이를 구호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었다.

선조 22년(1567)에 치러진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그 뒤에는 더 이상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벼슬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하여 운와대(雲臥臺)에 집을 짓고, 퇴계의 문하에서 학문을 이으면서 선대 유업을 계승하는 데 힘썼다.

말년에 이르기까지 강호에 묻혀 고향에서 자적(自適)하다 선조 5년(1572)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무덤 장지(葬地)는 영지산(靈芝山) 남쪽에 묘향(卯向)이었다.
자세히 보기
문집정보
구성 :
『청암유고』의 본문은 매우 소략한데, 유고의 내용으로는 청암이 저작한 「차김중온모재운(次金仲昷茅齋韻)」과 「희증종제언술(戱贈從弟彦述)」이라는 두 편의 시(試)가 고작이다.

나머지 본문을 차지한 5장 분량은 청암의 저작이 아니다. 부록 형식으로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과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이 보내준 만사(輓詞)와 진성(眞城) 이만규(李晩煃)가 청암의 사후에 지은 묘갈명(墓碣銘), 그 밖에 퇴계를 비롯한 사우들로부터 받은 시와 편지 일부가 편성되는 데 그쳤다.

결국 청암의 유고집이라 하더라도 청암의 작품은 그가 지은 짧은 시 두 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간역 :
『청암유고(靑巖遺稿)』는 1912년 청암(靑巖) 이원승(李元承)의 후손 이병연(李丙淵)이 청암의 아버지인 벽오(碧梧) 이문량(李文樑)의 시문집을 편찬하면서, 청암의 기록도 함께 정리한 것이다. 즉, 문집의 편찬과 간행 시기는 『벽오선생문집(碧梧先生文集)』과 같은 시기인 1912년이다. 책판의 간행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유고(遺稿)의 내용이 완전한 현존 인본을 참고하더라도, 『청암유고』의 분량은 6장에 불과하다. 이처럼 내용이 소략한 까닭은 이병연이 『벽오집(碧梧集)』을 편찬하면서 남긴 지문(識文)의 내용에서 짐작할 수 있다. 즉, 벽오를 비롯한 선대 조상들의 유문(遺文)으로 남아 있는 것이 지극히 희한(稀罕)하였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청암유고』는 별도로 간행되지 못하고, 아버지의 문집인 『벽오선생문집』이 간행되면서 그 부록의 형식으로 첨부되어 판각되었던 셈이다. 실제로 『청암유고』의 판수에 새겨진 제목 자체가 ‘부청암유고(附靑巖遺稿)’라 되어 있어, 『벽오집』에 붙여 간행한다는 의미로 판단할 수 있다.
목판정보
결락정보 :
『청암유고(靑巖遺稿)』를 새긴 전존판은 권1의 제3/4장 한 판에 불과하다. 따라서 내용이 완전한 인본이 6장 분량이므로, 양면 판각한 목판 두 판이 결락되었다. 결락된 장차는 제1/2장과 제 5/6장 두 판이 된다.
형태적특징 :
책판을 판각한 시점은 1912년이었고, 인출 횟수는 잦지 않았다. 하지만 청암(靑巖)의 아버지의 문집인 『벽오선생문집(碧梧先生文集)』의 사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책판에는 크고 작은 훼손이나 하자가 다소 발생되었다. 단일 판이 남아 있어서 나머지 판의 상태를 모두 추정하여 지적할 수 없겠으나, 판목의 제작 시기가 『벽오집(碧梧集)』과 같은 1912년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한편, 본문의 기본적인 판각 양식은 사주쌍변(四周雙邊)의 광곽(匡郭) 안에 계선(界線)을 새겼고, 글자의 배치는 본문이 10행 17자를 기본으로 하였다. 새긴 서체는 해서체(楷書體)로 『벽오집』과 동일한 글씨체이다. 이는 간행 작업 시 판하본(判下本)을 쓴 인물이 누구인지 는 알 수 없으나, 서사자(書寫者)의 서체를 그대로 새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판심에는 아래위 백구(白口)의 형태로 어미(魚尾)는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가 나타난다. 판심의 가운데 새겨진 제목은 ‘청암유고(靑巖遺稿)’이다.

마구리를 제외한 판의 크기로 세로×가로는 19×48.4cm이며, 판면의 반곽은 18.6×17.4cm이다. 이와 같은 외형 또한 『벽오집』과 비등하다는 사실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반면, 판목의 두께는 3.0cm로 다소 두꺼운 편이고, 무게는 1.8kg에 달한다. 그 밖에 목판의 좌우에는 마구리가 덧대어져 있고, 마구리와 본문의 결합 방식 또한 『벽오집』과 동일한 마구리 관통 후 판면을 결합한 형태이다. 그리고 마구리와 본문을 새긴 판의 결합은 결합 부분에 좌우측 각각 한 개의 쇠못을 박아 단단하게 고정하였다.

마구리의 형태는 단면이 정사각형으로 재단되었으며, 마구리의 바깥쪽에는 ‘벽오집(碧梧集) 삼사(三四)’라고 묵서(墨書)되어 있다. 이러한 묵서 기록은 이 『청암유고(靑巖遺稿)』문집 판이 『벽오집』과 같은 시기에 판각되었음을 재차 확인시켜주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와 같은 마구리 바깥의 묵서 기록에 대한 묵서 시점을 문제 삼을 수도 있다. 즉, 판목을 새긴 당시가 아니라 오랜 기간이 지난 후대에 판목 관리의 편의상 그렇게 묵서하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청암유고』의 경우 먹의 상태나 닿고 지워진 흔적으로 미루어, 묵서된 시점은 책판을 새긴 시기와 거의 동시기인 것으로 판단된다.
특이사항 :
전존판은 1판에 불과하며, 책판의 판각 시기 및 보존 공간이나 환경은 청암의 아버지의 문집인 『벽오선생문집(碧梧先生文集)』의 것과 동일하였던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남아 있는 판이 단일 판이라 하더라도, 책판의 외형을 살펴볼 때는 이 판이 1912년에 판각되었다는 점과 『벽오집』과 동일한 환경에서 보관되었다는 점, 그리고 판각된 뒤 인출이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등을 두루 감안하여야 한다.
책판정보
구분 내용 수량
卷1 (3,4) 1
卷1 (3,4) 1
卷1 (3,4) 1
卷1 (3,4) 1
卷1 (3,4) 1
卷1 (3,4) 1
卷1 (3,4) 1
서지/해제 작성자 : 임기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