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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재선생문집(二恥齋先生文集)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이치재(二恥齋) 신정모(申正模, 1691-1742)의 시문집을 새긴 책판이다. 소장 책판은 서문을 비롯하여 목록 및 세계도(世系圖), 본문을 새긴 6권 3책 분량을 대부분 갖추었으나, 권1의 제29/30장 등 11판은 손실되었다.
이치재선생문집(二恥齋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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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자
    신정모(申正模)(저), 신상헌·신돈식(申相憲·申敦植)(편)
    판심제
    二恥齋集
  • 기탁처
    아주신씨 회당공파종중
    서문
    김도화(金道和)(1898)
  • 발문
    신상헌((申相憲)(1899), 신돈식((申敦植)(1899)
    판각시기
    1899년
  • 완본수
    131
    현존수
    120
  • 결락수
    11
인물정보
• 신정모 [申正模, 숙종 17년(1691)-영조 18년(1743)]

문집의 저자 신정모(申正模) 선생은 의성 출신으로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경해(景楷), 호는 이치재(二恥齋)이다. 이치재(二恥齋)라는 호는 스스로 지었는데, 충(忠)과 효(孝)가 모두 모자라 부끄럽다는 겸손의 의미이다.
성균관에서의 학업 활동이 뛰어나 영남의 삼모(三某)로 칭송받던 신채(申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대석(申大錫)이고, 아버지는 신덕일(申德溢)이며, 어머니는 이성구(李星耈)의 딸 예안이씨(禮安李氏)이고, 부인은 안이순(安履順)의 딸 순흥안씨(順興 安氏)이다. 숙부인 신덕순(申德洵)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거창현감이 되다
그는 어린 시절 중부(仲父)인 신덕호(申德浩)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장성해서는 이만부(李萬敷)에게 수학하였다. 29세가 되던 숙종 45년(1719) 지금의 영주 지역인 영천(榮川)에서 실시하였던 증광(增廣)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이듬해(1720)에는 부정자(副正字)로 임명되었고, 그 해 숙종이 승하하였다. 영조 1년(1725)에 지평(持平), 정언(正言),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 등에 임명되었다.
영조 3년(1727) 병조좌랑(兵曹佐郞)과 강원도사(江原都事), 병조정랑兵曹(正郞)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거창현감(居昌縣監)에 제수되자 봉친의 편의가 있다며 어머니를 모시고 부임하였다.

◈소론이 몰락하면서 유배를 가다
하지만 그의 삶은 영조가 즉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론이 실각하면서 급격한 전환점을 맞게된다. 영조 4년(1728)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거창성을 반군에게 빼앗긴 죄로 군위(軍威)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석방되었지만, 그 뒤 암행어사 이흡(李潝)이 전과를 재조사, 보고하는 과정에서 소론계열이었던 그의 죄를 과장해 보고하여, 영조 11년(1735) 호남 흥양(興陽)에 또다시 유배되었다. 유배 중 인근의 많은 호남학자들이 배우러 왔고, 선생 또한 가르침을 아끼지 않았다.
45세가 되던 이듬해, 영조 12년(1736)에는 금산에 이배(移配)되었다가, 충청도 충주로 다시 이배(移配)되었다. 유배 중에도 학문 연구와 찬술 작업에 주력하며 역경을 이겨냈다. 49세 되던 영조 16년(1740) 모친이 돌아가시자, 효성이 지극했던 선생은 크게 슬퍼했다. 결국 오랜 유배 생활로 병약해진 몸에 천연두까지 앓게 되어, 영조 19년(1743) 5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그의 묘소는 현재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오로리에 위치한 오토산(五土山)에 모셔져 있고, 의성읍 팔성리에는 그의 유업을 기린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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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정보
구성 :
문집에 수록된 내용은 권1∼3에 부(賦) 2편, 사(辭) 3편, 시 140수, 서(書) 28편, 잡저 13편, 서(序) 3편, 기(記) 7편, 발(跋) 3편, 잠명(箴銘) 10편, 설(說) 7편, 변(辨) 1편, 상량문 1편이 실려 있다. 또 권4∼5에 제문(祭文) 8편, 애사(哀詞) 4편, 유장(遺狀) 7편, 묘갈명 1편이 수록되었다. 권6은 문집의 부록에 해당하고, 여기에는 연보(年譜)를 비롯하여, 언행습록(言行拾錄), 만사(輓詞) 29수, 제문(祭文) 18편, 행장(行狀), 묘갈명(墓碣銘), 고유문(告由文)과 후서(後敍)가 기록되어 있다.

◈퇴계의 주리론을 계승한 유학자
수록된 작품 중 부(賦)의 「효초사체기추곡유거(效楚辭體寄楸谷幽居)」와「감춘부(感春賦)」 및 사(辭)의 「우중낙사(憂中樂辭)」, 그리고 시(詩)의 「상춘만영(賞春謾詠)」 등은 모두 현실을 도피한 은둔생활에 대한 서정과 비애를 그리고 있다.
서(書)에는 퇴계의 주리론 학맥을 이은 밀암(密庵) 이재(李栽)와 주고받은 글이 여러 편 있다. 이재가 쓴『주서강록간보(朱書講錄刊補)』와 주희의 주자학 입문서『근사록(近思錄)』에 관한 의문점을 문답한 내용이다.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와 주고받은 서찰에서는 거경(居敬)과 궁리(窮理) 등 학문의 실천 방법을 탐구하고 있다. 이 밖에 조덕린(趙德鄰)과 이광정(李光庭) 등에게 보낸 서찰이 있다.
권3에 수록된 잡저(雜著) 중 「아림현방유절목(娥林縣榜諭節目)」은 삼강오상(三綱五常) 등 백성들이 지켜야 할 9개항의 절목을 기술한 것이다. 「입춘일서시백아(立春日書示伯兒)」는 아들에게 훈계한 것으로, 교경(矯輕), 경타(警惰), 면겸(勉謙), 계눌(戒訥), 교독(敎讀), 욱행(旭行)의 6개항으로 되어 있다. 또한 「상례기의(喪禮記疑)」는 당시 논란이 많았던 변례(變禮)에 대해 상세히 해설한 글이다. 설의 「경설(敬說)」은 중국의 역대 선현들의 말을 인용, 경에 대해 자세히 풀이하고, 경이 존양복초(存養復初)의 양법(良法)임을 역설한 것이다
문집에 수록된 전반적인 내용은 저자 신정모가 무고로 무신란(戊申亂)에 연루되어 사망하였으므로, 무신란(이인좌의 난)의 처리과정에서 희생된 인물의 사례를 이해하는데 의미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또한 18세기 전반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문인들의 학문적 문제의식과 교유망을 이해하기 위한 귀중한 자료이다.
간역 :
『이치재선생문집』은 이치재 신정모 선생의 유문을 고종 36년(1899) 5세손 상헌(相憲)과 돈식(敦植)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권두에 고종 35년(1898) 3월에 전행의금부도사(前行義禁府都事) 김도화(金道和)가 지은 서문이 있고, 권말에 김서일(金瑞一)의 후서 및 상헌과 돈식의 발문이 있다.
1864년 고종이 즉위하면서 신정모 선생이 복권(復權)되자 본격적인 문집 간행의 길이 열렸다. 이돈우(李敦禹, 1807∼1884)에게 행장을 받고, 1886년 김서일(金瑞一, 1694∼1780)에게 문집후서(文集後敍)를 받았다. 그 뒤 고종 35년(1898) 장석용(張錫龍, 1823∼1906)이 묘갈명을 짓고, 김도화(金道和)가 서문을 지었다. 이듬해인 고종 36년(1899) 1월경 문집이 간행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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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정보
결락정보 :
책판은 6권 분량의 목록 및 서ㆍ발(序ㆍ跋), 본문을 대부분 갖추었으나, 일부 판이 누락된 것으로 확인된다. 누락된 판은 양면 판각 기준으로 권1의 제29/30장, 권2의 제23/24장, 권3의 제33/34장, 권3의 제45/46장, 권3의 제49/50장, 권4의 제3/4장, 권4의 19/20장, 권5의 제35/36장, 권6의 제21/22장, 권6의 제23/24장, 권6의 제33/34장의 모두 11판 분량이다.
형태적특징 :
책판의 보존 상태는 망실된 판이 11판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양호한 편이며, 판의 내용은 사주쌍변(四周雙邊)의 광곽(匡郭) 안에 본문은 해서(楷書)체로 통일되게 새겼다.
본문의 판각 체제는 서문과 본문, 발문 등 본문 자수의 기본틀은 10행에 22자를 배치하여 일정하게 유지하였으며, 본문의 군데군데에 쌍행의 주를 판각하였다. 모든 판에 계선(界線)을 판각하였으며, 이치재집(二恥齋集)이라는 화구제(花口題)를 새겨두었다. 판심에는 권차와 ‘시(詩)’와 ‘서(書)’ 등 소제목을 판각하였다. 아래 어미의 아래 부분에 판의 해당 장차를 배치하였다.
판심의 어미는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로 균일하다. 판수(板首)의 제목은 ‘이치재선생문집(二恥齋先生文集)’이고, 화구(花口)의 제목은 문집명을 줄여 ‘이치재집(二恥齋集)’으로 표기하였다.

마구리를 제외한 판의 크기는 세로×가로가 21×50cm 내외로 비교적 고른 편이고, 반곽(半廓)의 크기는 세로×가로가 20×18cm로 거의 일정하다.
판목의 두께는, 얇은 판은 1.0cm에서 두꺼운 판은 3.0cm에 달해 2cm 가까운 편차가 발생하여 두께의 드나듦이 큰 편이다. 평균적인 두께는 1.8cm 내외로 제작되었다. 이에 따라 책판의 무게 또한 적게는 1.1kg에서 많게는 2.6kg이 넘어서 비교적 차이가 크다. 평균적인 목판의 무게는 1.5kg 내외로 제작되었다. 이러한 판목의 무게 차이는 판목을 재단할 때 연판자(鍊板者)가 재단을 달리하였거나 보관 환경에 따른 판목의 건조 상태나 습기에 노출된 정도가 달랐던 것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판목의 보존 상태는 전반적으로는 양호하지만, 일부 판에서는 판의 균열과 마구리의 균열 및 부식이 진행되었다.
예컨대, 판의 균열이 발생한 판은 권1의 목록을 새긴 제7/8장, 권1의 부(賦)와 사(辭)를 새긴 제1/2장, 권2의 제11/12장, 권2의 제21/22장, 권2의 제39/40장, 권3의 제37/38장, 권4의 제13/14장 등이 있다. 특히 권1의 목록 제9/10장 중 제9장의 우측 하단에는 판면 부분이 움푹 떨어져 나가는 손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보존 과정 중 충격으로 떨어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권1의 목록 제13/14장도 균열이 좌우로 크게 여러 군데 나타나고 있다.
또한 마구리의 균열이 발생한 판은 권2의 제35/35장 등이 있고, 본문을 새긴 판에서 충해나 누습으로 인한 판의 부식은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그리고 마구리의 부식이 일부 진행된 판은 권1의 제5/6장, 권1의 목록 제17장 등이 보인다.
이 밖에도 일부 판에서는 본문을 새긴 판면의 뒤틀림이 발생하였다. 뒤틀림이 발생한 판은 권1의 목록 제9/10장 등이 있다.
책판 제작 시 마구리와 본문을 새긴 판의 결합 형태는 나무못을 마구리와 결합되는 가운데에 한 개 또는 두 개를 박아 고정하는 방식으로 일관되게 제작되었다. 그리고 판면이 마구리의 좌우측에 고정되는 부분은 마구리의 끝까지 관통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구리의 홈 크기와 본문판이 결합되는 부분이 맞지 않아 흔들림이 발생할 경우, 마구리와 판면을 결합한 뒤 목심을 마구리의 좌우측 바깥 부분에서 끼우는 방식으로 보강하여 흔들림을 방지하였다.

마구리의 형태는 단면이 직사각형 또는 정사각형 형태로 크기도 비교적 균정한 편이며, 본문보다 3-5cm 내외로 크게 제작되어 본문을 새긴 판을 견고하게 지탱하고 있다.
또한 본문을 새긴 판면과 마구리의 결합 시 결합 부분은 마름모 형태로 줄여서 고정 작업의 효율성을 도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판면의 좌우에는 공간이 어느 정도 확보된 반면, 판면의 상하에는 광곽의 크기와 거의 동일한 정도로 여백의 두지 않았다. 이러한 재단 방식은 다른 문집판에서도 보이는 공통적인 현상으로, 목재를 절약하기 위한 의도와 인출시 먹의 낭비도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판면을 기준으로 마구리의 앞면과 뒷면에는 묵서(墨書)기록이 전혀 없다. 다만, 좌우면에는 문집명과 책판이 해당하는 장차를 묵서(墨書)해 두었다. 이를테면 ‘이치재집(二恥齋集) 권이(卷二) 삼십일장(三十一丈)’ 등과 같다. 한편, 다른 문집판의 경우 마구리의 좌우측에 목판을 새긴 각수명을 묵서로 기록한 사례가 많은 반면, 이치재집을 새긴 문집판에는 어떠한 각수 기록도 쓰여 있지 않다.
그 밖에도 본문을 새긴 판면의 글자 마모 정도와 먹이 묻은 흔적으로 볼 때, 인출 회수가 많았던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판각한 시점에 비하여 글자가 다소 마멸되었고, 마구리와 판면의 결합 공간까지 먹이 많이 스며든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전존하는 목판 중 단면으로 판각된 것은 목록 제17장을 새긴 판과 권6의 제31장을 새긴 판 및 권6의 제32장을 새긴 판 등 모두 3판에 불과하다. 책판은 거제수나무와 고로쇠나무를 사용하였다.
특이사항 :
남아있는 문집판 중 단면 판각된 권1의 목록 제15/16장과 단면 판각된 목록의 제17장, 단면 판각된 권6의 제32장을 새긴 판은 목판의 형태면에서 특이하다. 본문을 새긴 판면과 마구리의 결합 시 마구리를 관통하여 마구리의 끝부분에서 편평하게 재단되는 것이 일반적인 목판의 형태이다. 즉, 판면의 잉여 부분을 제거하지 않은 상태로 두어서, 판면 부분이 마구리를 좌우로 관통하여 10cm 이상 크게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처음 문집을 새길 당시에 판목의 좌우를 재단하지 않았거나, 후대에 판을 보충하면서 미처 잘라내지 않은 채 보관하여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마구리의 결합 부분에 고정하는 못이 나무못이 사용된 것으로 미루어 판각 초기부터 동일 형태로 만들어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권6의 제29/30장을 새긴 판의 뒷면에 해당하는 제30장 제3행에는 인출본 기준 ‘...병술장지(丙戌長至) / 일전교관(日前敎官)...’의 ‘병술장지(丙戌長至)’ 4글자가 의도적으로 파내어져 있다. 글자를 파낸 이후 인출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파낸 시점 또한 비교적 최근의 일로 여겨진다. 후대에 인위적으로 수정을 가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밖에도 권1의 제31장과 권5의 제32장을 새긴 판은 단면 판각된 두 판을 좌우에 마구리를 고정하여 한 판으로 완성하였다. 이는 판각 시 오류로 새로운 판을 대체하였거나, 일차 판각이 완료된 뒤 누락된 판을 보충하여 생긴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판목의 교정 사례로 권3의 제11/12장을 새긴 앞면에 해당하는 제11장의 제2-6행은 통째로 파내 내용이 교체되어서 특기할 만하다. 이러한 교정 방법은 오각이나 오류의 분량이 많을 때 주로 이루어지는 교정 방식이다. 특정 글자만을 대체하여 수정하기보다 단락 전체의 내용을 고칠 때 사용하는 목판본 교정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책판정보
구분 내용 수량
(1,2) 1
目錄 (3,4)(5,6)(7,8)(9,10)(11,12)(13,14)(15,16)(17,空) 8
卷1 (3,4)(1,2)(5,6)(7,8)(9,10)(11,12)(13,14)(15,16)(17,18)(19,20)(21,22)(23,24)(25,26)(27,28)(31,卷5-32) 15
卷2 (1,2)(3,4)(5,6)(7,8)(1,2)(3,4)(5,6)(7,8)(9,10)(11,12)(13,14)(15,16)(17,18)(19,20)(21,22)(25,26)(27,28)(29,30)(31,32)(33,34)(35,36)(37,38)(39,40) 23
卷3 (1,2)(3,4)(5,6)(7,8)(9,10)(11,12)(13,14)(15,16)(17,18)(19,20)(21,22)(23,24)(25,26)(27,28)(29,30)(31,32)(35,36)(37,38)(39,40)(41,42)(43,44)(47,48)(51,52) 23
卷4 (1,2)(5,6)(7,8)(9,10)(11,12)(13,14)(15,16)(17,18)(21,22)(23,24)(25,26)(27,28)(29,30)(31,32) 14
世系圖 (1,2) 1
卷5 (1,2)(3,4)(5,6)(7,8)(9,10)(11,12)(13,14)(15,16)(17,18)(19,20)(21,22)(23,24)(25,26)(27,28)(29,30)(31,卷4-33)(33,34)(37,38)(39,40) 19
卷6 (33,世系圖-3)(1,2)(3,4)(5,6)(7,8)(9,10)(11,12)(13,14)(15,16)(17,18)(19,20)(25,26)(27,28)(29,30)(31,空)(32,空) 16
서지/해제 작성자 : 작성:임기영
윤문:박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