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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선생일고(城隱先生逸稿)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성은(城隱) 신흘(申仡, 1550-1614)의 시문집을 새긴 책판이다. 책판은 서문과 본문, 발문 및 후지(後識)를 새긴 2권 1책 분량으로 본문 내용의 누락 없이 31판 완질을 갖추어 남아 있다.
성은선생일고(城隱先生逸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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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자
    신흘(申?)(저), 신돈식(申敦植)(편)
    판심제
    城隱先生逸稿
  • 기탁처
    아주신씨 회당공파종중
    서문
    류도헌(柳道獻)(1909), 김도화(金道和)(1909)
  • 발문
    이중명(李重明), 이만규(李晩煃)
    판각시기
    1909년
  • 완본수
    31
    현존수
    31
  • 결락수
    0
인물정보

• 신흘[申仡, 명종 5년(1550)-광해군 6년(1614)]

저자 신흘(申仡)의 본관은 아주(鵝洲)이며, 자는 구지(懼之), 호는 성은(城隱)이다. 아버지는 조선시대 효자로 이름을 떨친 신원록(申元祿)이며, 증조부는 준정(俊禎)이고, 모친은 숙부인(淑夫人) 벽진이씨(碧珍李氏)이다.

◈의병활동과 왜란 후 『난중사적(亂中事蹟)』편찬
신흘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인자하고 점잖았으며, 형제간 우의가 돈독하였다. 27살 되던 선조 9년(1576), 부친 회당공이 돌아가시자 3년 상을 무사히 치르고, 묘소 아래 집을 지어 ‘영모(永慕)’라는 편액을 달고 애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영가교수(永嘉敎授)를 지냈다. 왜란이 일어나자 형인 신심(申伈)을 도와 의병을 일으켰다. 수 백 명을 모집하여, 김해(金垓)·류종개(柳宗介)·정세아(鄭世雅) 등과 함께 왜적에 대항하였다.
선조 36년(1603)에는 조정의 명으로 최현(崔晛) 등과『난중사적(亂中事蹟)』을 편찬하였다. 이 저술에 대하여 완평(完平) 이원익(李元翼)은 근거가 넓으면서 정밀하고, 깊이 체득할 만하다고 극찬하였다.

◈사림 영수 정인홍을 논핵하는 상소를 올리다
선조 41년(1608)에는 경상좌도 선비들의 영수로서 당질 정봉공(鼎峰公) 홍도(弘道)와 함께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억울한 일을 변명하는 항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광해군 3년(1611)에는 남명 조식의 수제자이자 당대 사림의 영수 정인홍이 국정을 농락하고 성현을 모함하였다 하여, 무현죄(誣賢罪)로 논핵하기도 하였다. 당시 신흘은 62세의 노구에도 대궐까지 올라가 적극적으로 항변하며 상소(上疏)를 올렸다. 소문(疏文)의 내용은 당시 흉악한 무리가 조정에 가득하여 사사로운 감정으로 재앙을 만들고 있으니, 임금께서 널리 혜량하여 사악함을 물리쳐 주기를 간청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대북파의 영수 정인홍이 엄격하고 비타협적으로 소북파를 배척하였기다. 경상우도 영수인 정인홍이 이언적과 이황을 조정 문묘에서 퇴출시키려 하였기에, 신흘은 경상좌도의 영수로써 결사적으로 맞섰다.

◈아들 삼형제와 손자까지 단구서원에 함께 배향되다
1611년 이후로는 어지러운 세상에 나서지 않고 두문불출하였다. 경전과 역사책을 보면서 안빈낙도의 삶을 살았다. 아들 삼형제를 잘 교육하여 충신, 정치인, 학자로 키워 의성 지역 명문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고향에 은거하며 말년을 보내다가, 광해권 4년(1614) 6월 27일 정침에서 병으로 죽었으니, 향년 65세였다. 죽은 뒤 상훈과 추모좌승지로 증직되었다. 사림에서 신흘의 아들들인 신적도, 신달도, 신열도 삼형제를 비롯하여 신적도의 아들 신채(申埰)를 단구서원(丹丘書院)에 배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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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정보
구성 :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은 사림 선비의 표상
류도헌의 서문에 따르면, 성은공 신흘(申仡) 선생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불행을 겪었고, 혼탁한 세상을 만나 자기 포부를 펼치지 못하였다 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재(晦齋) 이언적과 이황 선생을 존경하고 보위하였던 바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준엄함과 대절 있는 선비의 표상이 되었음을 칭송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서문을 작성한 시점인 1909년까지도 후세의 귀감이 된다 하였다. 결국 성은공의 10대손인 신돈식이 공의 남은 글을 모아 간행에 이르게 되어, 자신에게 서문을 부탁하여 삼가 문건에 따라 선생의 행실을 모범삼아 글을 작성하게 된 경위를 밝혔다. 김도화 또한 유사한 맥락의 서문을 작성하여 권두에 첨부하였다.
본문인 권1은 부(賦) 5편, 시 10수, 소(疏) 2편, 서(書) 3편, 제문 1편, 잡저 5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부록에 해당하는 권2는, 선생의 행장·묘갈명·묘지·묘표 각 1편, 제문 3편, 만사 15편이 수록되어 있다.

◈의병활동의 구체적인 기록을 남기다
수록된 작품 중 몇몇 두드러진 글들이 남아 있다. 특히, 서(書) 가운데 「여도내의장김한림해류정자종개정진사세아(與道內義將金翰林垓柳正字宗介鄭進士世雅)」를 보면, 일직현에서 결진(結陣)한 의병의 작전수행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글에서 저자는 당시 의병들이 다른 부대와 연합작전을 펴지 않고 이웃 고을의 의병이 위급하여도 도와주지 않으며 싸움을 미루고 세월만 허송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또한 머지않아 바닥날 군량과 백성에 대한 신뢰의 실추, 그리고 이에 따른 이합집산을 지적하며, 기회를 놓치지 말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촉구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뿐만 아니라 잡저(雜著)의 「노섭유격사충문(勞葉遊擊思忠文)」과 「섭공위덕비(葉公威德碑)」는 예천에서 안동방면으로 진영을 옮겨온 명나라 장수의 노고를 치하한 내용으로, 명나라 사람들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상이상국완평서(上李相國完平書)」는 전란이 끝난 뒤 전란에 대한 기록을 실록청에 제공하면서 자신의 감회를 밝힌 내용이다. 임진왜란 당시 지방의병의 활동과 실상을 이해하는 데 간접적으로 참고가 된다.

권말에 수록된 이중명(李重明)과 이만규(李晩煃)의 발문에는 선생의 덕업과 치적이 하늘과 땅을 합친 만큼 넓고 끝이 없으며, 영원히 보존되어 후대에 올바름과 그릇됨의 귀감이 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더불어 간행의 주도자였던 신돈식 또한 후지(後識)에서 선생의 흩어지고 없어질 뻔했던 글들을 수집하여 두 권의 책으로 엮어서 간행하게 된 경위를 명기하였다. 문집의 간역이 완료된 시점은 발문의 작성 시점인 1909년 9월 16일 또는 그 이후로 여겨진다.
간역 :
『성은선생일고(城隱先生逸稿)』의 편찬 및 간행은 순종 2년(1909) 저자 신흘(申仡)의 10대손 신돈식(申敦植)이 주도하고, 동료 이만규(李晩煃)와 이중명(李重明) 등의 도움을 얻어 완성하였다. 문집의 권두에는 같은 해 2월에 작성된 류도헌(柳道獻)의 서문과 9월에 작성된 김도화(金道和)의 서문이 있다. 서문에 이어 세계도와 문집의 목록이 목판 분량 한 판으로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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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정보
결락정보 :
책판은 2권 분량으로 서문과 목록, 본문 및 발문과 후지(後識)를 새긴 31판이 완질로 남아 있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문집을 새긴 판 중 단면으로 판각된 목판이 없다는 점이다. 이는 문집의 분량이 적은 탓도 있으나, 후대 목판에 대한 보수나 판각작업 당시 오각이 발생하지 않았고, 체계적으로 판각 업무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형태적특징 :
책판의 전반적인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며, 새겨진 판의 형식은 다음과 같다. 먼저 본문의 경우 사주쌍변(四周雙邊)의 광곽(匡郭) 안에 내용은 해서(楷書)로 새겼고, 서문과 목록, 발문과 후지의 서체도 본문과 동일하다. 문집판은 권1에서 부록에 해당하는 권2에 이르기까지 모든 내용이 누락 없이 31판 완질로 남아 있다.

또한 판각 체제는 서문과 발문, 본문을 막론하고 장 당 10행에 한 행 18자를 기본으로 새겼다. 모든 본문에는 계선(界線)을 판각하였으며, 아래위 백구(白口)에 판심의 어미는 위쪽 상어미의 경우 상하향이엽화문어미(上下向二葉花紋魚尾)로 모두 통일되어 있다. 아래쪽 하단의 어미는 하상향일엽화문어미(下上向一葉花紋魚尾)로 역시 균일하게 새겨두었다. 아래위의 어미를 다르게 판각한 이례적인 판각 방식으로 볼 수 있다.
판수(板首)의 제목은 ‘城隱先生逸稿’이고, 판심(版心)의 제목도 동일하다.

마구리를 제외한 판의 크기는 세로×가로가 17×47cm 내외로 비교적 고른 편이고, 반곽(半廓)의 크기는 세로×가로가 17×17cm로 거의 일정하여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를 띈다. 일반적인 문집의 반곽 형태가 세로가 긴 직사각형 형태인데 반해 판형이 특이한 사례로 간주된다.
판목의 두께는 얇은 판은 1.2cm에서 두꺼운 판은 2.9cm에 달해 두 배 이상의 편차가 있다. 판목의 평균적인 두께는 2cm 내외로 제작되었다. 이에 따라 책판의 무게 또한 가벼운 판은 900g에서 무거운 판은 많게는 1.7kg에 달해 차이가 큰 편이다. 평균적인 목판의 무게는 1.2kg에서 1.5kg내외로 다른 문집판에 비하여 상당히 가볍게 제작되었다. 이는 책판 제작 재료로 가벼운 감나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판목의 보존 상태는 전반적으로는 양호하지만, 일부 판에서는 부분적으로 판의 균열과 마구리의 균열 및 부식이 진행되었다.
판의 균열이 발생한 판은 목록 권5의 제1/2장, 권1의 제1/2장, 제3/4장, 제19/20장, 권2의 제7/8장 등이 있다. 판면의 뒤틀림 현상은 거의 발생하지 않고 있다. 마구리의 균열이 발생한 판은 권1의 제27/28장, 권2의 제11/12장 등이 있고, 본문을 새긴 판에서 충해나 누습으로 인한 판의 부식은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마구리의 경우 권1의 제8/9장, 권2의 제9/10장의 우측 마구리 등에서 부식이 진행되었으나 보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외에도 마구리의 형태와 묵서 기록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책판 제작 시 마구리와 본문을 새긴 판의 결합 형태는 나무못, 즉 목심을 가운데에 한 개 또는 두 개를 관통시켜 고정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판면이 마구리에 고정되는 부분은 마구리의 좌우측 끝까지 관통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목판의 본문에 해당하는 판면의 모양은 마구리와 결합되는 지점에서는 마름모꼴 형태로 줄어들게 제작하여 마구리와 판면의 결합을 용이하게 배려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구리의 홈 크기와 본문판이 결합되는 부분이 맞지 않아 흔들림이 발생할 경우, 마구리와 판면을 결합한 뒤 목심을 마구리의 좌우측 바깥 부분에서 끼우는 방식으로 보강하여 흔들림을 방지하였다.
마구리의 형태는 단면이 직사각형 또는 정사각형 형태로 크기도 비교적 균정한 편이며, 본문보다 4cm 가량 크게 제작되어 본문을 새긴 판을 견고하게 지탱하고 있다. 마구리의 앞면이나 뒷면에는 묵서 기록이 없고, 목판 기준 좌우측 마구리에 문집명으로 ‘城稿’라는 문집명과 권차(卷次), 그리고 장차(張次)가 쓰여 있다. 이러한 묵서 기록은 문집판의 제작 시점이 최근인 1909년이기 때문에, 흐려지거나 훼손되지 않고 확연하게 판독된다.
특이사항 :
이 문집판은 새긴 시점이 그리 오래되지 않아 판면이나 마구리 등 문집판에 대한 보수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보수에 대한 흔적은 나무의 재질이나 쇠못을 사용한 점 등에서 쉽게 구분되고, 마구리의 형태에서도 쉽게 확인되기 때문이다. 목판을 새긴 이후 개별 글자나 자구(字句) 또는 문장에 대한 교정 사례도 없다.
다만 목록의 제3장을 새긴 면에서는 한 면 전체를 기준으로 제10행에서 제20행까지 가로 방향으로 판이 패인 훼손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훼손은 자연 열화(劣化)라기보다 인위적 손상으로 보인다.
판각한 서체면에서도 서문과 발문을 비롯한 권말의 후지(後識) 등이 모두 단정하고 동일한 필체의 단아한 해서체(楷書體)로 쓰여 있다. 이를 통해 판을 새기기 전 판하본을 쓴 서사자가 한 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책판정보
구분 내용 수량
(1,2)(3,目錄-3) 2
目錄 (1,2) 1
世系圖 (1,2) 1
卷1 (1,2)(3,4)(5,6)(7,8)(9,10)(11,12)(13,14)(15,16)(17,18)(19,20)(21,22)(23,24)(25,26)(27,28) 14
卷2 (1,2)(3,4)(5,6)(7,8)(9,10)(11,12)(13,16)(14,15)(17,18)(19,20)(21,22) 11
(1,2)(3,卷1-29) 2
서지/해제 작성자 : 작성:임기영
윤문:박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