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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선생속집(聾巖先生續集)

조선 중기의 문신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시문집의 내용을 보충한 속집(續集)의 책판으로 속집과 연보(年譜)가 각각 2권 분량으로 판각되었으며, 현재는 속집의 권1을 새긴 2판과 연보, 발(跋) 및 연보의 지(識)를 새긴 6판을 합쳐 모두 8판만이 남아 있다.
농암선생속집(聾巖先生續集)

1  /  8

  • 저자
    이현보(李賢輔)(저)
    판심제
    聾巖先生續集
  • 기탁처
    영천이씨 농암종택
    서문
    李希輔, 朴祥
  • 발문
    李中轍(1911), 年譜跋:李晚燾(1882), 李兼鎬
    판각시기
    1911년
  • 완본수
    0
    현존수
    8
  • 결락수
    0
인물정보
이현보(李賢輔) [세조 13년(1467) - 명종 10년(1555)]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조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경상북도 예안 출신으로,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자는 비중(棐仲), 호는 농암 또는 설빈옹(雪鬢翁)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참찬(參贊)이었던 이흠(李欽)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권겸(權謙)의 딸이다. 연산군 4년(1498) 식년문과 병과(丙科)에 합격하여, 교서관 권지부정자(校書館權知副正字)를 시작으로 영흥훈도(永興訓導)와 예문관검열겸춘추관기사관(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 봉교(奉敎), 전적(典籍) 등의 벼슬을 지냈다.

연산군 10년(1504)에 정언(正言)이 되어 서연관(書筵官)의 비행을 탄핵하다 안동의 안기역(安奇驛)으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중종 1년(1506) 전적에 다시 기용되었다.

중종 3년(1508)에는 형조정랑(刑曹正郞)이 되었으나, 부모 봉양을 위해 영천군수(永川郡守)로 옮겼다. 중종 18년(1523)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으며‚ 중종 27년(1532)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과 지제교(知製敎)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의 관력(官歷)은 ‘상위친걸외(常爲親乞外)’라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수령(守令)이나 관찰사(觀察使) 같은 외직(外職)이 대다수였다.

중종 37년(1542) 치사(致仕)하였고, 이후 향리에 은거한 상태에서 가선(嘉善)을 거쳐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명종 10년(1555) 89세까지 향수(享壽)하였다. 사후의 시호(諡號)는 효절(孝節)이었다.

교우 관계로는 퇴계의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李堣)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과 가까웠다. 그리고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과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과도 많은 교유를 하였다. 또한, 나이는 어렸지만 퇴계와는 가장 각별한 사이로 주고받은 시와 편지가 많았으며, 농암이 지은 여러 저술들이 퇴계와의 토론을 거친 후 이루어졌다.

스승으로는 허백당(虛白堂) 홍귀달(洪貴達)에게 경전을 배웠다고 전한다. 농암 이현보는 영달을 추구하지 않은 그의 삶이 보여주듯이 늘 자연과 교감하며 소박하게 자연을 노래한 시와 시조를 많이 남겼다. 아울러 영남 사림파 내에서 퇴계 이황과 회재 이언적에 버금가는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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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정보
구성 :
본 책판은 현종 9년(1665)에 간행된 『농암선생문집(聾巖先生文集)』의 원집(原集)에서 누락된 내용을 모아서 편찬한 것으로, 『속집(續集)』2권 1책과 농암의 「연보(年譜)」 2권 1책을 판각한 것이다. 전존하는 책판이 두 판에 불과하므로, 책판으로 찍은 인본을 기준으로 그 내용을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속집』의 편성은 권수에 목록을 수록하고, 권1에는 광흥사여문대휴(廣興寺與文大休) 등 시(詩)와 서(書), 묘갈(墓碣)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원집에서 빠져 있는 작품들을 수록하였으며, 서는 이황(李滉)에게 보내거나 답한 것 외에 김유(金綏)에게 보낸 편지도 1편 실려 있다. 묘갈(墓碣) 1편은 안보문(安普文)을 애도하기 위해 작성한 글이다.

『속집』의 권2는 부록에 해당하고, 이희보(李希輔)와 박상(朴祥)이 지은 서(序) 2편과 시, 차운시(次韻詩) 등이 실려 있다. 또한 『속집』 권2의 말미에는 1911년 신해(辛亥)에 작성된 이중철(李中轍)의 발문과 이강호(李康鎬)의 지문(識文)이 수록되어 있다.

한편, 「연보」는 2권으로서 권수에 세계도(世系圖)를 실었고, 권1은 농암의 연보를 기록하였다. 연보의 권2는 부록에 해당하는데, 교서(敎書) 1편과 「분강서원상량문(汾江書院上樑文)」, 「봉안문(奉安文)」, 현손(玄孫) 이영운(李榮運) 등의 「문집고성문(文集告成文)」, 「청선액소(請宣額疏)」, 도산서원(陶山書院)과 삼계서원(三溪書院)의 유생 및 여러 후손들의 제문(祭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 연보의 2권 끝에 고종 19년(1882) 이만도(李晚燾)가 작성한 「연보발(年譜跋)」이 실려 있다.
간역 :
『속집(續集)』은 1911년에 간행되었다. 이만도가 지은 「연보발(年譜跋)」에 의하면, 연보는 고종 19년인 1882년에 작성되었지만, 이 연보가 실제로 판각된 시기는 1911년 이재명(李在明) 등이 『속집』을 간행할 때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단순 기록상 고종 19년에 연보만 별도로 판각되었을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을지라도, 현존본의 사례로 판단컨대 1911년 『속집』과 함께 판각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현존 판본 중 『속집』 4권 2책의 완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고려대학교, 성균관대학교와 성암고서박물관에 인본이 소장되어 있다. 특히, 성암고서박물관 소장본에는 이만도의 「연보발」 외에 1911년에 12대손 이병연(李昺淵)이 지은 발문(跋文)이 첨부되어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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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정보
결락정보 :
『농암선생속집(聾巖先生續集)』의 권1의 제3/4장, 권1의 제5/6장 및「발문(跋文)」과 「연보(年譜)」를 판각한 5판이 남아 있다. 현존 인본과 대조하여 결락된 판수를 산정해 보면, 속집의 경우 양면 판각한 목판 11판이 결실된 것으로 나타나고, 「연보」또한 2권 분량으로 편성되었으므로, 양면 판각 목판 기준 29판이 결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형태적특징 :
판목의 보존 상태는 1911년에 판각된 이후 인출 횟수가 많지 않았음을 바로 알아볼 수 있다. 본문을 새긴 글자와 마구리 등에 아주 사소한 마모 현상만 나타날 뿐, 판의 상태는 양호하다.

책판의 소장 현황은 속집의 발문 제1/2장과 속집 발문 제4장/연보 지문(識文) 제1장을 판각한 2판이 남아 있다. 『속집(續集)』의 2권 내용과 「연보(年譜)」의 2권 내용 대다수가 결락되어 있다.

본문의 판각 양식은 사주쌍변(四周雙邊)의 광곽(匡郭) 안에 계선(界線)을 판각하고, 글자의 배치는 10행 18자로 원집(原集)의 양식과 동일하다.

판심에는 아래위 백구(白口)에 어미(魚尾) 형태는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로 균일하다. 마구리를 제외한 판의 크기는 세로와 가로의 크기가 20×50cm 내외로 일정하다. 그리고 판면을 새긴 반곽의 크기 또한 세로와 가로가 대략 19×17cm에서 거의 오차가 발생하지 않았다.

반면, 판목의 두께는 편차가 있어서 얇은 판은 1.5cm와 2.1cm로 다소간 차이가 나며, 책판의 무게도 적은 것은 1.3kg에서 많은 것은 1.7kg까지 편차가 발생하였다.

책판의 좌우에는 마구리로 덧대어져 있으며, 책판 제작 시 마구리와 본문을 새긴 판의 결합 형태는 가운데 부분에 철못 두 개를 박아 고정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판면이 마구리에 고정되는 부분은 마구리의 좌우 끝까지 관통하지 않고, 마구리의 절반 정도만 파내어 끼워넣고 못을 박아 고정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마구리의 형태는 단면이 정사각형으로 재단되었고, 크기는 본문보다 5cm 내외로 크게, 비교적 균일하게 제작되었다. 마구리의 좌우측 바깥쪽에 다른 판에서 보이는 묵서(墨書)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한 가지 책판의 외형상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이 판이 판각된 연대에 관한 문제이다. 속집의 판각 연대는 인본의 기록상으로는 1882년 연보의 발문이 작성된 시기라는 관점, 1911년 후손인 이중철(李中轍), 이강호(李康鎬), 이병연(李昺淵)이 나란히 발문을 작성한 시기라는 관점, 그리고 1935년 추각(追刻)하였다는 관점 등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속집을 새긴 전존판 두 판은 1911년 속집을 간행할 당시 새긴 판으로 보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1911년에 판각된 책판의 마구리에는 한결같이 묵서로 권차(卷次)와 장차(張次)를 표시하였고, 마구리도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남에 따라 마모가 일부 진행된 상태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이사항 :
속집의 발문 제4장을 새긴 판의 제7행에는 한 글자가 파내져 글자 한자가 일실되었다. 이 글자는 현존 판본과 비교하면 ‘거마병전(車馬騈闐)’의 ‘거(車)’ 자임을 알 수 있다. 각수의 실수 또는 문맥상의 오류로 파내졌는지는 현 시점에서 분명하게 밝히기 어렵다. 다만, 글자가 없어도 앞뒤 문맥은 통한다는 사실 정도가 확인될 뿐이다.

그리고 「연보(年譜)」권1의 제3/4장의 한쪽 마구리는 파손되어 떨어져 나갔다. 또한 권1의 제 1/2장 역시 한쪽 마구리의 절반 정도가 파손되기도 하였다.

「연보」권1의 제33/34장과 같이 본문의 두주(頭註)에 해당하는 부분은 2행 또는 3행을 튀어나오게 올려 판목을 재단한 것도 특기할 만하다. 이러한 주(註) 기입 양식은 문집 책판 제작 시 종종 보이는 사례이다.
책판정보
구분 내용 수량
卷1 (3,4) 1
卷2 (5,6) 1
卷1 年譜 (3,4)(13,14)(33,34) 3
(1,2)(4,年譜 識-1) 2
年譜 跋 (1,2) 1
卷1 (3,4) 1
卷2 (5,6) 1
卷1 年譜 (3,4)(13,14)(33,34) 3
(1,2)(4,年譜 識-1) 2
年譜 跋 (1,2) 1
卷1 (3,4) 1
卷2 (5,6) 1
卷1 年譜 (3,4)(13,14)(33,34) 3
(1,2)(4,年譜 識-1) 2
年譜 跋 (1,2) 1
卷1 (3,4) 1
卷2 (5,6) 1
卷1 年譜 (3,4)(13,14)(33,34) 3
(1,2)(4,年譜 識-1) 2
年譜 跋 (1,2) 1
卷1 (3,4) 1
卷2 (5,6) 1
卷1 年譜 (3,4)(13,14)(33,34) 3
(1,2)(4,年譜 識-1) 2
年譜 跋 (1,2) 1
卷1 (3,4) 1
卷2 (5,6) 1
卷1 年譜 (3,4)(13,14)(33,34) 3
(1,2)(4,年譜 識-1) 2
年譜 跋 (1,2) 1
卷1 (3,4) 1
卷2 (5,6) 1
卷1 年譜 (3,4)(13,14)(33,34) 3
(1,2)(4,年譜 識-1) 2
年譜 跋 (1,2) 1
서지/해제 작성자 : 임기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