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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은선생실기(大隱先生實紀)

고려 후기의 무신이었던 대은(大隱) 변안렬(邊安烈, 1334-1390)의 연보 및 실기(實紀)를 새긴 책판이다. 소장 책판은 서문과 목록, 연보(年譜) 및 본문 등 2권 1책 분량을 새긴 35판이 완질을 갖추어 남아 있다.
대은선생실기(大隱先生實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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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자
    변안렬(邊安烈)(저)
    판심제
    大隱先生實紀
  • 기탁처
    원주변씨 구양서원
    서문
    김세락(金世洛)(1925), 김병구(金秉矩)(1950)
  • 발문
    판각시기
    1950년
  • 완본수
    35
    현존수
    35
  • 결락수
    0
인물정보
• 변안렬 [邊安烈, 충숙왕 3년(1334) - 공양왕 2년(1390)]

◈고려의 무인으로 원주 변씨의 시조
변안렬은 고려 말에 활동한 명장으로, 자는 문성(文成), 호는 대은(大隱),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본래 원나라 사람으로, 원통(元統) 2년(1334) 4월 갑자일 심양(瀋陽)에서 태어났다.
18세 되던 1351년 정월, 당시 세계 최강이던 원나라에서 무과에 장원급제한 뛰어난 실력자이다. 형부상서(刑部尙書)로 승진하여 12월 공민왕과 노국공주를 수행해 고려에 건너와 귀화하였다. 공민왕 1년(1352), 공민왕이 친척인 판추밀(判樞密) 원의(元顗)의 딸과 결혼시키고, 원(元)씨의 본관인 원주를 본관으로 하사하여, 원주 변씨의 시조가 되었다.

◈최영, 이성계와 함께 홍건적 토벌, 제주 정벌, 왜구 격퇴에 공을 세우다
공민왕 11년(1362)에 안우(安祐)를 따라 홍건적을 격파하여 이등공신을 녹훈(錄勳)받고, 거듭 승진해 판소부감사(判少府監事)가 되었다. 또 안우 등과 함께 개경을 수복한 공으로 일등공신에 녹훈되고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제수되었으며 추성보조공신(推誠補祚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이어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되었고, 두 번 겸직하여 지삼사밀직사사(知三司密直司事)가 되었다.

공민왕 22년(1373) 계축(癸丑) 8월에 총의용우군(總義勇右軍)이 되었고, 공민왕 23년(1374) 9월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어 최영과 같이 제주의 적을 토벌하고 귀환하여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에 배명되었다가 평리(評理)로 전직되었다. 우왕 1년(1375)에 우왕(禑王)이 즉위하자 공이 원수가 되어 심왕(瀋王)을 격파한 공으로 추충량절선위익찬공신(推忠亮節宣威翊贊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우왕 2년(1376) 9월에 양광·전라도도지휘사(楊廣全羅道都指揮使) 겸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었다. 11월에 왜적이 부령(扶寧)에 침입해 행안산(幸安山)에 올라가자, 나세(羅世), 조사민(趙思敏), 유실(柳實) 등과 함께 적을 대파하였다. 당시 참획(斬獲)한 바가 심히 많았고, 첩보를 상진(上秦)하여 왕이 백금 한 덩이와 안마(鞍馬) 및 의복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개선하여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승진하였다.

◈왜구 격퇴로 이성계와 동급의 상을 받다
우왕 3년(1377) 3월에 경기도 총사에 제수되어 왜구를 공격할 새 4월에 왜선이 서강으로 침입하자 공이 최영과 더불어 격퇴시켰다. 그 해에 왜구의 침략은 극에 달했고, 전라경상도가 심하게 약탈 당했다.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도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삼고 변안열를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왜구를 완전 토벌하였는데, 우왕은 두 사람에게 각각 황금 50냥을 상으로 내렸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이공, 변군이라며 두 사람의 무훈을 똑같이 칭송한 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 후로도 많은 전공을 세워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에 봉해지고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승진하였으며, 공양왕(恭讓王) 초에는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다.

◈위화도 회군 후 이성계를 위협할 장수였기에 결국 참화를 당하다
이성계와 조민수의 위화도 회군 이후, 스스로 호를 대은(大隱)이라 짓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 목은(牧隱) 이색(李穡) 등 조선 건국을 거절한 고려 삼은(三隱)의 호와 같은 맥락이다.
창왕 1년(1389) ‘김저(金佇)의 옥사’가 일어났다. 이성계 제거와 우왕 복위를 모의하였다는 혐의로 가장 명망있는 장수였던 변안렬이 거명되어 한양(漢陽)에 유배되었다. 창왕은 변안렬의 처형을 주청하는 신하들의 고변을 다섯 번 거절하였으나, 결국 처형을 허락하였다.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반대한 대가로 《고려사》에는 간신 열전에 이름을 올렸지만, 사실 대은 변안렬 선생은 고려의 충신이다.
위화도 회군 후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옹립하며 최고의 실권자가 된 것은 이성계다. 변안렬은 조민수, 이성계와 함께 전장을 누빈 최고의 장수였기에 이성계가 몹시 존중하면서도 두려워하였다. 결국 우왕 재옹립 사건인 ‘김저의 옥사’로 죽음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 후 이성계는 변안렬을 위화도 회군의 공신으로 추증한다. 회군공신이 되었지만 윤이(尹彛) · 이초(李初)의 난이 일어나자 다시 삭탈관작 당하고 가재(家財)는 몰수당했다. 1392년(태조 1) 7월 17일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왕으로 즉위하자 즉시 관직을 돌려주고 가재를 환급했다. 그리고 두 옹주(翁主)를 변안렬의 두 손자에게 시집 보냈다.

1825년(순조 25)에 영남 유림들이 선생을 정몽주와 함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추향(追享)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1920년에 그를 배향하는 송곡서원(松谷書院)이 완성되었다. 그 후 1984년 원주변씨 세거지 봉화(奉化) 거촌(巨村) 구동(龜洞)에 구양서원(龜陽書院)을 세워 대은 변안렬을 주벽(主壁)으로 배향(配享)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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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정보
구성 :
문집의 구성을 살펴보면, 권1의 본문 내용에 앞서 2장 분량의 고려원주부원군대은선생연보서(高麗原州府院君大隱先生年譜序)가 가장 앞쪽에 배치되어 있다. 이어서 7장에 걸쳐, 선생의 연보를 자세하게 소개하였다. 그리고 김세락과 김병구가 작성한 서문이 4장 분량으로 이어진다.
문집의 전체 목차에 해당하는 <대은선생실기목록(大隱先生實紀目錄)>이 이어지고, 권1에는 가(歌) 1편, 시(詩) 6수, 부록으로는 제문과 전(傳)이 수록되었다.
권2에는 보첩(譜牒) 1편, 동사(東史) 1편, 휘찬여사(彙纂麗史) 1편, 제현평론(諸賢評論) 1편이 수록되었다. 권말에는 후손 변호원(邊鎬元)과 변석인(邊錫仁)이 작성한 지문(識文) 두 편이 실려 있다.

◈이방원(李芳遠)의「하여가(何如歌)」에 맞선 변안열의 「불굴가(不屈歌)
선생의 작품 중 본문에 수록된 작품은 많지 않으나, 권1의 「불굴가(不屈歌)」는 주목할 만하다. 분량은 짧지만 수작으로 평가된다. 일명 ‘충의가’라고도 한다. 원가(原歌)는 전하지 않고, 한역가(漢譯歌)만 전한다.
이방원(李芳遠)은 잔치를 베풀고 고려 왕실 추종자들의 마음을 떠보려 「하여가(何如歌)」를 지어 심중을 드러내었다. 그러자 정몽주는 「단심가(丹心歌)」로, 변안열은 이 작품으로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굽힐 수 없다는 뜻을 드러냈다고 한다. 전하는 한역가는 아래와 같다.

穴吾之胸洞如斗(혈오지흉동여두) 내 가슴 말(斗)처럼 구멍 뚫어
貫以藁索長又長(관이고삭장우장) 새끼줄로 길게 길게 꿰어
前牽後引磨且戛(전견후인마차알) 앞에서 끌고 뒤어서 당겨 갈리고 찢길망정
任汝之爲吾不辭(임여지위오불사) 너희들 하는 대로 내 사양치 않으리만,
有慾奪吾主此事吾不從(유욕탈오주차사오부종) 내 임금 빼앗는 일 나는 굽힐 수 없도다.

선생은 고려 왕조를 지탱하려는 신념이 확고하였고, 불리한 상황에서도 힘있는 정적에게 굴복하지 않았기에, 결국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렀다. 작품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절개와 신념을 굽히지 않겠다는 내용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였다. 비슷한 나이의 동료 장수 이성계와의 정치적 쟁투에서 패배한 뒤 지은 작품이라 많이 회자되었다. 이 작품은 ‘가사’로 전승되어 조선조 후기 3대 시조집의 하나인 『청구영언』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간역 :
『대은선생실기』는 고려 말에 활동한 변안렬(邊安烈)의 실기를 새긴 것으로, 전존 판본은 2권 1책의 분량이 남아 있다.
목판은 비교적 가까운 시기인 1950년경 판각된 것으로 여겨진다. 문집의 내용 중 1910년의 기록과 1925년에 작성한 서문, 그리고 본문 중 1930년의 기록 등 판각 연도를 비정할 수 있는 다양한 시점이 기록되어 있다. 문집의 가장 앞부분에 편집된 <고려원주부원군(高麗原州府院君)대은선생연보서(大隱先生年譜序)>의 작성 시점은 가장 최근인 1950년이다. 문집의 실제 서문에 해당하는「대은선생실기서(大隱先生實紀서序)」에서 밝힌 서문의 작성 시점 또한 1925년 김세락(金世洛)이 쓴 것과 1950년 3월 의성 후인 김병구(金秉矩)가 쓴 두 편이 실려 있다. 이로 미루어 실제 목판이 새겨진 시점은 1950년 3월 또는 그 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의성 사람 김병구가 서문을 작성하고, 연보의 서문을 안동 사람 권상규(權相圭)가 쓴 점, 그리고 목판이 봉화의 구양서원(龜陽書院)에 보관된 점으로 미루어, 목판의 판각처는 안동이나 봉화 일대라고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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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정보
결락정보 :
책판은 문집을 새긴 2권 1책 분량의 35판이 완질로 남아 있다. 다만, 본문을 새긴 판 중 상당수는 단면으로 판각되어 있다. 문집을 판각할 경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양면판각으로 장차(張次)의 순서에 맞게 새기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다. 목판의 분량을 절약하고 마구리 제작 등의 시간이나 판각 업무의 효율화, 보관의 효율성 등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전존 목판 중 단면 판각된 것은 후대 보각으로 추정된다. 또다른 이유는 외관 상 판면의 마모도에도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형태적특징 :
소장 목판은 판이 새겨진 시점이 비교적 근세인 1950년이라, 전반적인 판목의 보존 상태도 큰 마멸이나 훼손 없이 양호한 편이다. 본문의 체제는 사주쌍변(四周雙邊)의 광곽(匡郭) 안에 10행 19자의 해서체로 판각하였다.
서체는 서문, 본문, 권말의 지문 등에 모두 동일하게 유지되었고, 본문의 군데군데에 쌍행(雙行)의 주(註)가 판각되었다. 모든 판에 계선(界線)을 판각한 형식이며, 판심에는 ‘大隱先生實紀 卷一 七’ 등과 같이 판심제와 장차(張次)를 판각하였다.
판심(版心)의 어미(魚尾)는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로 균일하다. 판수(板首)의 제목은 ‘大隱先生實紀’로 판각하였다.
마구리를 제외한 판의 크기는 세로×가로가 19×46cm 내외로 비교적 고른 편이고, 반곽(半廓)의 크기는 세로×가로가 18×16cm로 거의 일정하다.
판목의 두께는 얇은 판은 2.5cm에서 두꺼운 판은 3.0cm에 달해 비교적 고른 편이다. 평균적인 판목의 두께는 2.7cm 내외로 두껍게 제작되었다. 책판의 무게 또한 적게는 1.2kg에서 많게는 1.6kg정도로 편차가 크지 않다. 평균적인 목판의 무게는 1.3kg 내외로 제작되었다. 전체적으로 판목의 크기와 두께 및 무게가 비교적 고른 것은 판의 제작 시 연판자와 목수가 일률적으로 제작하고, 판의 보존 또한 유사 환경에서 잘 관리되었기 때문이다.
판목의 보존 상태는 전반적으로 양호하지만, 일부 판에서는 판의 균열과 마구리의 균열 및 부식이 부분적으로 진행되었다.
인쇄되는 판면에 균열이 발생한 판은 권1의 목록 제1/2장, 연보 제3/4장, 권1의 제8/27장 등이 있다. 판면에 부식이 진행되거나 충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판각 후 인쇄가 잦아, 인쇄에 따른 자연 마모 현상은 진행되더라도, 목판에는 먹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판의 부식 방지, 방충 방해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마구리의 균열이 발생한 판으로는, 권1의 연보를 새긴 제3/4장 등이 있다. 본문을 새긴 판에서 충해나 누습으로 인한 판의 부식은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마구리의 부식이 일부 진행된 판은 권1의 제25장 등이 보인다. 이 밖에 전존하는 모든 판에서 판면의 뒤틀림 현상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마구리의 형태와 묵서 기록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책판 제작 시 마구리와 본문을 새긴 판의 결합 형태는 쇠못을 마구리와 결합되는 가운데에 두 개씩 박아 고정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판면이 마구리의 좌우측에 고정되는 부분은 마구리의 절반 정도까지 파내어 고정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연보 제6/권1의 제21장, 권1의 제23/24장의 두 판은 마구리의 양쪽 끝까지 관통하는 방식이 병행되었다. 이러한 제작 방식의 차이는 이 판들이 나머지 판들과 제작 시기가 다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원서(原序)가 쓰여진 1925년과 권상규(權相圭) 등이 서문을 작성한 1950년에 각기 따로 새겨진 것이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다.

마구리의 형태는 단면이 직사각형 또는 정사각형 형태로 크기도 비교적 균정한 편이며, 본문보다 3-5cm 내외로 크게 제작되어, 본문을 새긴 판을 견고하게 지탱하고 있다.
본문을 새긴 판면과 마구리의 결합 시 결합 부분은 마름모 형태로 줄여서 효율적으로 고정하였다. 판면의 좌우에는 공간이 어느 정도 있지만, 판면의 상하는 광곽의 크기와 거의 동일할 정도로 여백이 없다. 이러한 재단 방식은 다른 문집판에서도 보이는 공통적인 현상으로, 목재를 절약하고 인출시 먹의 낭비를 줄이고자 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일부 판에서는 판면을 기준으로 마구리의 좌우측면에 문집의 권차(卷次)와 장차(張次)를 묵서해 두었다. 판을 새긴 각수명이나 인명은 보이지 않는다. 권차와 장차의 표기 방식은 ‘年譜序 一二, 卷二 七章, 卷二 九十’ 등과 같다.
책판은 돌배나무로 제작되었다.
특이사항 :
권2의 단면 판각된 목판들 이를테면 권2의 제11장, 제12장, 제13장, 제14장 등의 판각 시기가 논점으로 남는다. 이들 목판의 판각 시기로 가능성이 있는 시점은 첫째, 원서(原序)의 작성 시점과 권말의 변석인(邊錫仁)이 쓴 지문(識文)의 작성 시점인 1925년이다. 두 번째는 이 목판들의 전체 판각 시점으로 여겨지는 <연보서(年譜序)>의 작성 시점인 1950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1950년 이후의 어느 시점에 이루어진 보각 가능성 등을 생각할 수 있다.
다만, 현 시점에서 형태와 외형적 특징만으로 판각 시점을 단언하기는 어렵다. 다만 단면 판각된 목판들의 제작 방식이나 먹이 묻은 정도로 미루어 보아, 1950년 이후 보각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책판정보
구분 내용 수량
(1,2)(3,4) 2
年譜序 (1,2) 1
目錄 (1,2) 1
年譜 (1,2)(3,4)(5,卷1-22)(6,卷1-21)(7,卷1-13) 5
卷1 (1,2)(3,4)(5,6)(7,空)(8,27)(9,10)(11,12)(14,26)(15,16)(17,18)(19,20)(23,24)(25,空) 13
卷2 (1,2)(3,4)(5,6)(7,空)(8,空)(9,10)(11,空)(12,空)(13,空)(14,空)(15,空)(16,空)(17,18) 13
서지/해제 작성자 : 작성:임기영
윤문:박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