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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당일고(暮醒堂逸稿)

조선 중기의 학자 모성당(暮醒堂) 임세장(任世章, 1637-1695)의 시문집 3권 분량을 새긴 책판이다. 목록 및 본문을 판각한 상당수 판이 누락되었고, 전존판은 본문을 새긴 7판이 남아 있다.
모성당일고(暮醒堂逸稿)

1  /  7

  • 저자
    임세장(任世章)(저)
    판심제
    暮醒堂逸稿
  • 기탁처
    풍천임씨 강와종중, 풍천임씨 모성당종중
    서문
  • 발문
    판각시기
    1750년 이후
  • 완본수
    29
    현존수
    7
  • 결락수
    22
인물정보
임세장(任世章) [인조 15년(1637) - 숙종 21년(1695)]

조선 중기의 학자 임세장(任世章)은 자는 여정(汝貞)이고, 호는 모성당(暮醒堂)이다. 본관은 풍천(豊川)이고, 형제는 5명에,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증조부는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으로 추증된 임훈(任勳)이고, 조부는 무과(武科) 병절교위(秉節校尉) 훈련원 주부(訓練院主簿)를 지낸 임내중(任乃重)이다. 아버지는 임경윤(任景尹)이고,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참봉(參奉)을 지낸 박진경(朴晉慶)의 딸이다.

인조 15년(1637) 3월 4일에 태어나, 5세 때에 이미 글을 깨우쳐 독서하기를 즐겼으며, 어려서부터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해하는 것이 남달랐다고 한다.

현종 13년(1672)에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며, 숙종 5년(1679) 동당시(東堂試)에서 장원(壯元)을 차지하였다. 또한, 숙종 12년(1686)에 치러진 식년(式年) 문과(文科)에서 급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모성당은 과거 합격 후에도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모성당의 중장년 시절은 고향에 머물면서 영남의 여러 문사들과 교유하였고, 고산(孤山) 이유장(李惟樟)과는 특히 친분이 깊었다. 의성(義城)의 빙계서원(冰溪書院)에서 강론하기를 즐겼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과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추향(追享)하였다.

숙종 18년(1692)과 숙종 19년(1693) 두 차례에 걸쳐 영남 지역의 군량미 납세의 폐단을 아뢰는 소(疏)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주자서(朱子書)』에 심취하여 일신을 삼가면서, 『대학연의(大學衍義)』,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을 정사(精寫)하기도 하였다.

숙종 21년(1695) 봄에 동생이 죽어 몹시 애통해 하던 차, 같은 해 7월 24일 신협리(新峽里)에 있는 초정(草亭)에서 향년 59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그리고 그 해 10월 의성 금성산(金城山)에 있는 조부의 묘 아래에 장지가 마련되었다.
문집정보
구성 :
문집의 구성 및 내용은 권상(卷上)에 시(詩) 18수, 소(疏) 3편, 서(序) 1편, 기(記) 1편, 명(銘) 2편, 송(頌) 1편, 상량문(上樑文) 1편이 수록되었다. 권중(卷中)에는 제문(祭文) 13편, 잡저(雜著)로 설(說) 1편과 전(傳) 1편, 사적(事蹟) 1편이 실려 있다. 그리고 권하(卷下)는 부록(附錄)으로, 이광정이 모성당에 대하여 작성한 행장 1편과 증손 임필대가 작성한 「행적초기」 1편을 수록하고 있다.

수록된 작품 중에서 시는 모성당이 지은 것으로, 그 대부분은 차운시(次韻詩)이다. 또한, 명승이나 고적에 대해 그 자신의 소회와 경치를 조화시켜 읊은 작품도 있다. 한편, 상권(上卷)에 수록된 소 가운데 「청빙계서원삼선생제향소(請氷溪書院三先生祭享疏)」는 임진왜란 때 공이 컸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과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학계에 공로가 현저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빙계서원(泳溪書院)에 제향할 것을 청한 글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청파열읍좌수차지군무소(請罷列邑座首次知軍務疏)」는 군세(軍稅) 납입과 관련하여 지방 제도의 허점을 강경하게 지적한 상소문이다. 영남의 여러 고을에서 읍(邑)의 좌수(座首)들은 군무(軍務)에는 전혀 경험이 없고 오직 문묵(文墨)과 조두(俎豆)만을 아는 사대부들뿐이다. 모성당은 그러한 사대부들을 군정(軍政)에까지 참관시킴으로 해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을 말하고, 좌수 역시 군무에 관여하느라 지방의 정사(政事)에는 자연히 소홀해져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에 그 대책으로 주(州)와 현읍(縣邑)에 강무당(講武堂)을 설치해 천총(千摠)에서 초관(哨官)에 이르기까지 총융(摠戎)의 직을 맡게 하고, 좌수는 본분인 민정(民政)에 전념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밖에 「청견감진제소(請蠲減賑濟疏)」는 당시 영남 지방의 흉년 상황을 논하고 농민들에게 면세해 주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도내 백성을 위한 대작(代作) 형식의 소문(疏文)으로 특기할 만하다.
간역 :
『모성당일고(暮醒堂逸稿)』는 모성당(暮醒堂) 임세장(任世章)의 시문집으로, 3권 1책으로 간행된 책판본이다. 본 책판의 판각 시점에 대해서는 서문(序文)이나 발문(跋文)의 기록이 없어, 현 시점에서 자세하게 밝히기는 어렵다.

다만, 문집을 새긴 책판이 모성당종중(暮醒堂宗中)에 보관되어 왔던 점과 문집의 권말에 첨부된 이광정(李光庭)의 행장(行狀) 및 모성당의 증손자인 임필대(任必大)의 「행적초기(行蹟草記)」를 통해 그 판각 시점을 어느 정도 추정해 볼 수 있다. 즉, 본 문집 판은 임필대가 이광정 등에게 모성당의 행장을 받아서, 영조 26년(1750) 이후 의성(義城)의 금성(金城) 일대에서 판각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목판정보
결락정보 :
『모성당일고』를 새긴 책판은 전존하는 판이 7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본문의 내용이 완전한 인본과 비교하여 전존판의 결락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즉, 전존본인 상․중․하 3권 1책의 인본과 대조하면, 양면 판각한 책판을 기준으로 목록을 새긴 2판이 모두 결락되었다.

또한 상권(上卷)의 경우 제3/4장, 제7/8장, 제11/19장의 3판이 남아 있으므로, 7판 반이 결락되었다. 중권(中卷)은 제15/16장과 제17/18장의 두 판이 남아 있으므로, 10판 반이 결락되었다. 하권(下卷)은 제1/2장과 제3/4장의 두 판이 남아 있으므로, 3판 반이 결락되었다.

결국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모성당일고』의 완질은 29판이며, 이 가운데 단면 판각된 판이 한 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전존하는 판이 7판에 불과하므로, 나머지 22판이 결락된 상태로 파악된다.
형태적특징 :
『모성당일고(暮醒堂逸稿)』 판의 판각 작업은 18세기 중엽에 모성당(暮醒堂) 임세장(任世章)의 증손자 임필대(任必大)에 의하여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판각 시점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가 없다. 다만, 문집의 말미에 수록된 임필대의 「행적초기(行蹟草記)」에서 문집의 간행 경과를 일부 밝히고 있어, 이를 통해 영조 26년(1750) 이후 그의 주도 하에 판각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그리고『모성당일고(暮醒堂逸稿)』는 완질이 29판으로 추정되는데, 이 가운데 7판이 모성당종중(暮醒堂宗中)에 남아 있다. 전존판들의 상태는 전반적으로 양호하며, 판면의 자획도 마멸이 그다지 진행되지 않아, 초각(初刻)된 뒤 인출이 많이 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마구리에 균열이 나 있거나 본문을 새긴 판면에도 갈라짐 현상이 나타나는 등 부분적으로 하자 및 훼손이 발생하기도 하여, 그간의 세월을 짐작할 수 있다.

책판의 기본적인 체제와 형식을 살펴보면, 본문은 사주쌍변(四周雙邊)에 계선(界線)을 두고, 해서(楷書)의 가지런한 글자체로 판각하였다. 글자의 배치는 10행 20자를 기본으로 하였다. 또한, 판심의 어미(魚尾)는 모든 판에서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로 일정하다. 판심 중앙에 새겨진 제목은 ‘모성당일고(暮醒堂逸稿)’이며, 장차(張次)는 각 권마다 연속되지 않게 따로 새겼다.

한편, 마구리를 제외한 판의 크기를 살펴보면, 세로의 크기는 20cm 내외로 비교적 일정한 편이나, 가로의 길이는 52cm에서 55cm까지 편차가 약간 발생하였다. 반면, 본문을 새긴 반곽(半廓)의 크기는 세로×가로의 크기가 19×17cm 내외로 균일한 편이다.

전존판의 판목 두께는 2.5cm 내외로 일정한 편이다. 이에 따라 책판의 무게도 큰 편차가 없이 2.0kg에서 2.5kg으로 그리 큰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다.

마구리와 본문을 새긴 판의 결합 방식은 본문의 판면이 마구리의 좌우측 끝까지 관통하여 결합된 방식으로 일관되게 제작되었다. 이 때 본문 판과 마구리의 고정 방식은 좌우측 마구리의 가운데 부분에 하나 또는 두 개의 나무못을 박아 고정하였다. 다만, 마구리에는 판면을 고정하기 위하여 박은 나무못으로 인한 갈라짐 현상이 일부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 마구리의 형태는 본문보다 약 3cm 정도 아래위로 크게 제작되었으며, 높이와 형태가 일정한 정사각형 형태를 기본으로 하였다.

한편, 마구리의 바깥쪽에는 책판 관련 서지 사항을 묵서(墨書)해 두었다. 묵서된 서지 사항의 표기 방식은 한문으로 썼으며, ‘모성당일고(暮醒堂逸稿) 권상(卷上) 삼(三)’ 또는 ‘모성당일고(暮醒堂逸稿) 권지상(卷之上) 팔(八)’ 등과 같다. 다만, 전존판이 7판에 불과하여 확정할 수 없으나, 판을 새긴 각수에 대한 기록은 전존판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묵서 기록은 마구리의 양쪽에 모두 필서되어 있으며, 일부 판에서는 마모나 오염으로 묵서 기록이 판독되지 않는다.

이 밖에 판각 당시 책판은 양면 판각을 원칙으로 새겨졌던 것으로 보이고, 전존하는 책판 7판도 모두 양면 판각으로 되어 있다.
특이사항 :
『모성당일고』를 새긴 책판이 판각된 시점은 영조 26년(1750) 경이다. 책판은 초각된 뒤 문중에서 보관되어 왔던 것으로 판단되는데, 26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상당수 책판은 일실되었고, 크고 작은 하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전존판이 7판이 불과하여 확정할 수 없으나, 초각된 뒤 추가로 보충하거나 보각(補刻)된 판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책판에 발생한 결함 가운데 마구리에 금이 가거나 눈에 띄는 균열이 발생한 판은 권상(卷上)의 제3/4장, 권상의 제7/8장, 권상의 제11/19장, 권중(卷中)의 제17/18장, 권하(卷下) 제1/2장이 있다.

한편, 본문을 새긴 판면에 갈라진 현상이 보이는 판은 권상의 제3/4장, 권상의 제11/19장의 두 판이 있다. 이 밖에 권상의 제7장을 새긴 본문의 제1-7행 상단부는 충격으로 판의 일부가 훼손되기도 하였다.
책판정보
구분 내용 수량
目錄 (1,2)(3,4) 0
(3,4)(7,8)(11,19) 3
(15,16)(17,18) 2
(1,2)(3,4) 2
目錄 (1,2)(3,4) 0
(3,4)(7,8)(11,19) 3
(15,16)(17,18) 2
(1,2)(3,4) 2
目錄 (1,2)(3,4) 0
(3,4)(7,8)(11,19) 3
(15,16)(17,18) 2
(1,2)(3,4) 2
目錄 (1,2)(3,4) 0
(3,4)(7,8)(11,19) 3
(15,16)(17,18) 2
(1,2)(3,4) 2
目錄 (1,2)(3,4) 0
(3,4)(7,8)(11,19) 3
(15,16)(17,18) 2
(1,2)(3,4) 2
目錄 (1,2)(3,4) 0
(3,4)(7,8)(11,19) 3
(15,16)(17,18) 2
(1,2)(3,4) 2
目錄 (1,2)(3,4) 0
(3,4)(7,8)(11,19) 3
(15,16)(17,18) 2
(1,2)(3,4) 2
서지/해제 작성자 : 임기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