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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병선생문집(石屛先生文集)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석병(石屛) 이회보(李回寶, 1594-1669)의 시문집을 새긴 책판이다. 소장 책판은 서문과 목록 및 본문을 새긴 72판이 남아 있으나, 완질을 산정하면 양면 판각 기준 67판이 결락되어 있다.
석병선생문집(石屛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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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자
    이회보(李回寶)(저), 이학원·이평원(李學源·李平源)(편)
    판심제
    石屛先生文集
  • 기탁처
    진성이씨 호봉공파종중
    서문
    홍직필(洪直弼)(1849)
  • 발문
    이강호(李康鎬)(1853)
    판각시기
    1853년 이후
  • 완본수
    139
    현존수
    72
  • 결락수
    67
인물정보
• 이회보 [李回寶, 선조 27년(1594) - 현종 10(1669)]

석병 이회보 선생의 본관은 진보(眞寶)이고 자(字)는 문상(文祥), 호는 석병(石屛)이다. 이희청(李希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원회(元晦)이고, 아버지는 헌납(獻納) 이돈(李燉)이다.
선조 27년(1594) 7월 20일 출생하여, 흥해 배씨(興海 裴氏)와 결혼해 4남을 두었다.
인조 7년 (1629) 별시(別試)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뒤,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남한산성까지 호종하였으며, 그 곳에서 척화와 주전론을 펼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가 체결됨을 보고 김상헌 등과 함께 낙향해서 은거하였다.

◈김자점을 탄핵하고 효종에게 직간하는 신하가 되다
효종 1년(1650년)에는 ‘기축봉사(己丑封事)’라는 장문의 소(疏)를 올려 김자점(金自點)의 횡포와 간계를 낱낱이 지적하면서 그를 탄핵하였다. 김자점이 왕을 무시하고 도의를 저버린 ‘무군부도(無君不道)’의 대역 죄인임을 주장하였다. 이와 아울러 사헌부(司憲府)나 사간원(司諫院) 등 대간(大諫)의 기능이 엄하지 못해, 역신을 처벌하지 못하고 있음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김자점의 죄상을 천하에 알리고, 사사(賜死)되게 하였다.
이러한 충정으로 말미암아 그는 말직에 있으면서도 직간하는 위국충정이 뛰어나다 하여 효종 3년(1652)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특진하게 된다. 나라에 어려운 상황이 있을 때 국왕이 의견을 구하면 그에 대해 올리는 상소인 ‘구언응지(求言應旨)’를 여러 편 지어 올려 왕의 신임을 받았다.
얼마 뒤에는 정평부사로 부임하였다가, 효종의 북벌계획(北伐計劃)을 도와 군비(軍備)를 충실히 하여 표리(表裏)를 하사(下賜)받기도 하였다.
효종 6년(1655) 관직을 사직하고 은퇴, 이듬 해 예빈시정(禮賓寺正)과 종부시정(宗簿寺正)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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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정보
구성 :
본문의 수록 내용은 권1·2에는 부(賦) 4편, 시 245수, 권3·4에 소(疏) 8편, 권5에 병자남한일기(丙子南漢日記), 잡저 4편, 서(序) 1편, 기(記) 2편, 설(說) 1편, 권6에 전(箋) 4편, 계(啓) 1편, 잠(箴) 2편, 명(銘) 2편, 송(頌) 1편, 논(論) 2편, 고유문(告由文) 4편, 부록(附錄)으로 그를 위해 지은 만사(輓詞)와 그의 행장(行狀) 및 묘갈명(墓碣銘)이 실려 있다.

◈주전론을 주장하였으나, 삼전도 굴욕을 보고 은거하다
수록된 작품 중 시(詩)는 저자가 만년에 사직하고 은퇴하여 지내면서 지은 것이 많다. 특히 시는 문장의 규모가 크고 의미가 깊으며 그의 굳은 절개가 잘 나타나 있다고 평가된다. 그리고 아버지 돈(燉)과 이공(李珙) 및 배도형(裵道亨) 등의 시에 차운(次韻)한 것이 수작으로 평가되고, 「조회곡명욱시(曹悔谷明勗詩)」와 같은 시에는 명(明)에 대한 절의와 청(淸)과 화의 후의 충분(忠憤)이 잘 드러나고 있다.
권3과 권4에 수록된 소(疏)에는 병자호란 중에 남한산성에서 왕을 호가(扈駕)할 때 화의에 반대하고 전쟁을 계속할 것을 주장한 것들이 주를 이룬다. 그 중에서도 승려 육허(六墟)를 장수로 천거한 내용의 「남한호가시소(南漢扈駕時疏)」가 대표적이다.
또한, 인조 27년(1649)에 왕의 학문으로 『춘추(春秋)』를 강조하고, 시폐(時弊)를 혁파하고 의리를 분명히 할 것을 주장하였다. 김자점의 죄상을 논한 1만 5천여자의 상소 「기축봉사(己丑封事)」는 후대에 두고두고 회자되는 작품이다.

◈척화론과 주화론의 대립을 일기로 기록하다
뿐만 아니라 「병자십이월일남한산성중위동방록(丙子十二月日南漢山城重圍同房錄)」은 인조 13년(1636) 12월 11일부터 인조 14년(1637) 2월 1일까지 당시 조정의 논의와 자신의 견문 및 전쟁 과정 등을 기록한 일기 형식이다. 어가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고, 청군의 침입 소식이 조정에 알려지는 과정과, 화의가 성립된 이후의 일까지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권5에 수록된 설(說)의 「붕자미정설(朋字未正說)」은 ‘朋(붕)’자의 어원을 음양의 원리로 설명하면서 자신의 붕당관을 밝힌 것이다. 논(論)의 「순경양웅숙우론(荀卿揚雄孰優論)」은 정통 성리학자의 입장에서 순자와 양웅을 사문(斯文)과 군신지도(君臣之道)의 죄인이라고 주장한 글이다.

『석병선생문집』은 선생의 문장과 작품을 살피는 문학적인 가치뿐 아니라 인조 연간의 정치 세력간의 관계 및 주화론자(主和論者)와 척화론자(斥和論者)의 대립 등을 연구하는 데 사료적인 가치도 뛰어난 문집으로 평가된다.
간역 :
『석병선생문집』은 조선 중기 활동한 이회보의 시문집을 그의 후손인 평원(平源)과 방손(傍孫) 원표(元杓) 등이 간행한 문집이다.
권두에는 헌종 15년(1849) 작성한 홍직필(洪直弼)의 서문이 수록되어 있고, 서문에서는 이회보의 곧은 성품과 충(忠)‚ 덕(德)과 인물됨 그리고 문장과 역학 및 편집경위를 적었다.
문집의 간행 시기는 일부에서는 서문의 작성 시점인 헌종 15년(1849)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권말에 수록된 이강호(李康鎬)의 발문이 이보다 늦은 철종 4년(1853)에 작성되었으므로, 실제 문집의 판각 시기는 1853년 또는 그 이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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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정보
결락정보 :
문집판은 서문과 목록, 본문 등 부분별로 결락판이 매우 많다. 현재 남아 있는 판은 72판이며, 양면 판각 기준으로 완질을 산정하면 완질은 139판에 달한다. 결락판의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문(序文) : 1/2, 3/4
목록(目錄) : 7/8, 11/12, 15/16
권1 : 1/2, 3/4, 11/12, 13/14, 25/26, 27/28
권2 : 9/10, 19/20, 23/24, 25/26, 29/30, 31/32, 33/34, 37/38, 39
권3 : 5/6, 11/12, 13/14, 17/18, 19/20, 21/22, 23/24, 33/34, 35/36, 37/38,
39/40, 41/42
권4 : 1/2, 5/6, 9/10, 13/14, 15/16, 17/18, 19/20, 23/24, 29/30, 37/38,
39/40, 41/42, 43/44, 47/48
권5 : 11/12, 13/14, 15/16, 29/30, 37/38, 39/40, 43/44/, 45/46
권6 : 7/8, 9/10, 13/14, 17/18, 19/20, 21/22, 25/26, 27/28, 29/30, 31/32,
35/36, 37/38, 41/42

이상과 같이 서문 2판, 목록 3판, 권1은 6판, 권2는 9판, 권3은 12판, 권4는 14판, 권5는 8판, 권6은 13판이 결락되었다. 완질에서 67판이 결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형태적특징 :
문집판은 판목의 제작 시점이 19세기 중반임에도 불구하고 절반가량 결락이 발생하였고,보존 상태가 좋지 못하다. 문집판은 부분적으로 후대에 보수가 이루어졌으나, 마구리가 훼손된 일부 판들은 그대로 보관되어 왔다.

목판에 새긴 본문의 체제는 사주쌍변(四周雙邊)의 광곽(匡郭) 안에 서문을 새긴 판은 5행 9자의 초서체 대자(大字)로 판각하였다.
본문은 해서체(楷書體)로 새겼으며, 기본틀은 10행에 20자를 배치하여 일정하게 유지하였으며, 본문의 군데군데에 쌍행(雙行)의 주(註)를 판각하였다. 모든 판에 계선(界線)을 판각하였으며, 판심에는 ‘石屛先生文集’이라는 판심제(版心題)와 장차(張次)를 그 아래에 새겨두었다.
판심(版心)의 어미(魚尾)는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로 균일하다. 판수(板首)의 제목은 ‘石屛先生文集’으로 새겼다.

마구리를 제외한 판의 크기는 세로×가로가 20×50cm 내외로 비교적 고른 편이고, 반곽(半廓)의 크기는 세로×가로가 19×17cm로 거의 일정하다.
반면, 판목의 두께는 얇은 판은 1.1cm에서 두꺼운 판은 3.0cm에 달해 3배 가까운 편차가 있다. 평균적인 판목의 두께는 2.0cm 내외로 비교적 두껍게 제작되었다. 이에 따라 책판의 무게 또한 적게는 1.0kg에서 많게는 2.2kg이 넘어서 비교적 차이가 크다. 평균적인 목판의 무게는 1.3kg 내외로 제작되었다. 이러한 판목의 무게 차이는 판목을 재단할 때 연판자(鍊板者)가 재단을 달리하였거나, 보관 환경에 따라 판목의 건조 상태나 습기에 노출된 정도가 달랐던 것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판목의 보존 상태는 문집판의 절반 가까이 결락이 발생하였고, 남아있는 72판 중에서 훼손된 판들도 다소 보인다.
판의 균열이 발생한 판은 권1의 서문을 새긴 제5/6장, 목록 제1/2장, 제13/14장, 권1의 제15/16장, 권2의 제1/2장, 제7/8장, 제17/18장, 권3의 제1/2장, 권4의 제31/32장 등이 있다. 판면에 부식이 진행되거나 충해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이는 판각 후 인쇄가 잦아지면서 인쇄에 따른 자연 마모 현상은 진행되더라도, 목판에는 먹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판의 부식이 방지되고 더불어 방충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구리의 균열이 발생한 판은 권1의 서문을 새긴 제5/6장, 서문 제9장, 목록 제13/14장, 권1의 제21/22장, 권3의 제15/16장 등이 있다. 마구리의 부식이 진행된 판은 보이지 않으며, 본문을 새긴 판면의 뒤틀림 현상도 거의 발생되지 않았다.
책판 제작 시 마구리와 본문을 새긴 판의 결합 형태는 나무못을 마구리와 결합되는 가운데에 한 개 또는 두 개를 박아 고정하는 방식으로 일관되게 제작되었다. 그리고 판면이 마구리의 좌우측에 고정되는 부분은 마구리의 끝까지 관통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구리의 홈 크기와 본문판이 결합되는 부분이 맞지 않아 흔들림이 발생할 경우, 마구리와 판면을 결합한 뒤 목심을 마구리의 좌우측 바깥 부분에서 끼우는 방식으로 보강하여 흔들림을 방지하였다.
마구리의 형태는 단면이 직사각형 또는 정사각형 형태로 크기도 비교적 균정한 편이며, 본문보다 3-5cm 내외로 크게 제작되어 본문을 새긴 판을 견고하게 지탱하고 있다.
또한 본문을 새긴 판면과 마구리의 결합 시 결합 부분은 마름모 형태로 줄여서 고정 작업의 효율성을 도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판면의 좌우에는 공간이 어느 정도 확보된 반면, 판면의 상하에는 광곽의 크기와 거의 동일한 정도로 여백의 두지 않았다. 이러한 재단 방식은 다른 문집판에서도 보이는 공통적인 현상으로, 목재를 절약하기 위한 의도와 인출시 먹의 낭비를 줄이고자 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일부판에서는 마구리의 좌우측면에 문집명과 장차를 묵서하여 두었다. 마구리의 앞면이나 옆면에 묵서한 형식은 불규칙하다. 일부 판에서는 묵서 기록이 없기도 하다. 묵서 기록은 ‘석병선생문집(石屛先生文集) 서(序) 오육장(五六丈)’ 등과 같다. 이러한 묵서 기록은 문집 판각 시 필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판의 보관 과정 중 또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먹이 지워져 판독되지 않는 경우도 다수이다. 또한 마구리가 교체된 판에는 묵서 기록이 생략되었다.
전존하는 72판의 목판 중 단면으로 판각된 것은 없고, 모두 양면 판각으로 되어 있다. 책판은 고로쇠나무와 산벚나무로 제작되었다.
특이사항 :
『석병선생문집』을 새긴 목판은 새겨진 시점이 1853년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문집판들에 비해 분실이 많이 발생하였고, 거칠게 다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권1의 제17/18장을 새긴 우측 마구리는 절반 정도가 세로로 떨어져 나갔고, 권1의 제23/24장을 새긴 판은 좌측 마구리가 가로로 절반가량 부서진 채 보수되지 않았다. 이러한 파손 현상은 권3의 제29/30장을 새긴 판에도 동일하게 보인다. 즉, 우측 마구리에서 세로로 절반가량 떨어져 판면의 고정 부위가 모두 노출되었음에도 보수나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체계적인 보강 작업이 필요할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권5의 제9/10장과 제23/24장 등과 같이 일부 판에서는 마구리의 목질과 재단 방식이 확연하게 달라, 교체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훼손된 나머지 판들에 대해서도 후속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또 한가지 특기할 점은 본문의 내용 중 대두법의 판각 방식을 지적할 수 있다. 즉, 서문의 제9장을 새긴 판의 사례이다. 다른 문집판에서는 일반적으로 대두(擡頭)되는 특정 행을 튀어나오게 재단하거나 그 부분만을 이음쇠로 돌출되게 올려서 제작하는 방법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 판에서는 판면은 직사각형으로 재단하고 대두되는 행을 모서리까지 올려 판각하고 나머지 행들을 모두 한 단 낮게 판각한 점이 이례적이다.
그 외에 부친인 호봉(壺峰) 이돈(李燉)의 ‘호봉선생문집’에 있는 단판과 단판끼리 묶여 양면판의 형태로 보관된 판이 있다. 같은 종중에서 보관된 목판들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경우로, 서문의 마지막인 9장 뒷면에 호봉선생문집 서문 9장이 붙어 양판으로 처리되어 있다.
책판정보
구분 내용 수량
(5,6)(7,8)(9,) 3
目錄 (1,2)(3,5)(4,6)(9,10)(13,14)(17,卷4-45) 6
卷1 (5,6)(7,8)(9,10)(15,16)(17,18)(19,20)(21,22)(23,24)(29,30) 9
卷2 (1,2)(3,4)(5,6)(7,8)(11,12)(13,14)(15,16)(17,18)(21,22)(27,28)(35,36) <(外板(hb_a)-(,39)> 11
卷3 (1,2)(3,4)(7,8)(9,10)(15,16)(31,32)(25,26)(27,28)(29,30)(43,卷4-50) 10
卷4 (3,4)(7,8)(11,12)(21,22)(25,26)(27,28)(31,32)(33,34)(35,36)(46,49) 10
卷5 (1,2)(3,4)(5,6)(7,8)(9,10)(17,18)(19,20)(21,22)(23,24)(25,26)(27,28)(31,32)(33,34)(35,36)(41,42) 15
卷6 (1,2)(3,4)(5,6)(11,12)(15,16)(23,24)(33,34)(39,40) 8
서지/해제 작성자 : 작성:임기영
윤문:박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