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한국국학진흥원
ENGLISH알림마당
Home> 목판아카이브> 아주신씨 회당공파종중 > 회당선생문집

회당선생문집(悔堂先生文集)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회당(悔堂) 신원록(申元祿, 1516-1576)의 시문집을 새긴 책판이다. 소장 책판은 서문과 목록 및 연보와 발문(跋文) 등 4권 2책 분량으로 완질이 남아 있다.
회당선생문집(悔堂先生文集)

1  /  63

  • 저자
    신원록?(申元祿)(저), 신정모(申正模)(편)
    판심제
    悔堂集
  • 기탁처
    아주신씨 회당공파종중
    서문
    이광정(李光庭)(1739)
  • 발문
    이상정(李象靖)(1769)
    판각시기
    1769년 이후
  • 완본수
    63
    현존수
    63
  • 결락수
    0
인물정보
• 신원록 [申元祿, 중종 11년(1516) - 선조 9년(1576)]

문집의 저자 신원록은 조선 중기 활동한 의성 출신의 학자로서 효자로 명성이 높다. 선생의 본관은 아주(鵝洲)이고, 자(字)는 계수(季綏) 또는 순보(順甫)라 하였다. 호(號)는 회당(悔堂)으로, 퇴재(退齋) 신우(申祐)의 6세손이다. 참봉(參奉)을 지낸 신수(申壽)의 다섯 아들 중 셋째로 태어났다. 형은 신석록(申錫祿)과 신택록(申宅祿)이며, 동생은 신도수(申道洙)와 신헌록(申憲祿)이다.

◈효자로 명성을 떨치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갸륵하고 학문이 뛰어났다. 11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가 병이 들어 인근에서 약을 구할 수가 없자, 집에서 수백 리 떨어진 팔공산까지 가서 약을 구해 왔다. 그러한 정성으로 형인 신원복(申元福)과 함께 8년 동안 아버지를 간호하였으나, 부친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형과 함께 3년간 여묘살이를 했다. 여묘살이가 끝난 후에는 묘소 아래에 재실을 세웠다.
선생은 일찍이 홀로 된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연친곡(宴親曲)」 8규(閨)를 지어 불렀다. 선조 7년(1575) 모친상을 당해서는 형과 함께 60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눈비를 가리지 않고 지극 정성으로 하루 세 번 묘소에 가서 곡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로 인해 병을 얻어 선조 8년(1576)에 죽었다.
광해군 시절 어명으로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도 이름을 올릴 만큼 효자로 유명했다.

◈당대 거유 남명 조식, 신재 주세붕, 퇴계 이황에게 직접 배우다
21세 되던 중종 30년(1536) 가을에는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에게 나아가 학문을 닦았고, 중종 32년(1538)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25세 되던 중종 34년(1540)에는 부인 이씨에게 장가들었고, 중종 37년(1543) 풍기군수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건립하자 그곳으로 나아가 배움을 청하였다. 그리고 스승 주세붕이 세상을 떠나자 심상(心喪) 삼년을 지냈다고 한다.
34세 되던 명종 4년(1549)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풍기군수로 재임할 때에는 백운동서원에 머물며 구봉령(具鳳齡), 조목(趙穆), 김팔원(金八元) 등과 강론하며 교유하였다. 또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를 종유하며 학문에 매진하기도 하였다.

◈장천서원을 세우고, 향약에 힘쓰다
36세 되던 명종 6년(1551)에는 장수현(長水縣)의 훈도(訓導)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에는 형 신원복과 함께 서원을 세워 의성(義城)이 관향인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을 배향하는 데 앞장섰다. 이 서원은 그의 주도로 “장천(長川)”이라는 사액을 받게 되었다.
또한 49세 되던 명종 19년(1564)에는 청도군 훈도(訓導)로 임명되었고, 지역을 위해 스승 퇴계에게서 향약을 필사해 실행하고, 난민을 구제하기 위한 진휼장(賑恤場)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장년기 이후에는 고장의 발전과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대소과(大小科) 출신 인사들의 모임인 연계소(蓮桂所)를 설립하고, 문중 인사를 모아 사당에 참배하며 학문을 권장하는 모임인 월삭회(月朔會)를 조직하는 등 많은 일을 하였다.
세상을 떠난 지 39년 뒤인 광해군 7년(1615) 그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마을에 효자문이 세워지고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추서되었다. 그리고 장대서원(藏待書院)에 배향되었다.
자세히 보기
문집정보
구성 :
본문의 수록 내용은 권1에 부(賦) 4편, 시 45수, 권2에 서(書) 2편, 잡저(雜著) 6편, 제문(祭文) 3편이 수록되었다. 권3과 권4은 부록에 해당하고, 여기에는 효우록(孝友錄), 행장(行狀), 습유(拾遺), 묘지, 묘표 , 속삼강행실, 문소지(聞韶誌), 제묘문, 장대서원봉안문(藏待書院奉安文), 상향축문, 풍영루상량문(風詠樓上樑文), 이산구원묘우상량문(尼山舊院廟宇上樑文), 사우록(師友錄), 사우록발(師友錄跋) 등이 수록되어 있다.

◈장천서원 건립의 전말을 기록으로 남기다
부(賦) 가운데 「삼근부(三近賦)」는 지(知), 인(仁), 용(勇)의 3덕목을 노래한 것이고, 나머지 3수도 철리(哲理)를 읊고 있다. 시(詩)는 동지들과 화답한 것이 대부분이고, 평담한 풍격을 지니고 있다. 서(書)는 주세붕(周世鵬)과 서원 학생에게 보낸 것으로, 장천서원(長川書院)의 운영에 대한 내용이다.
권2의 잡저에는 「유붕자원방래불역낙호론(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論)」,「업유재완의(業儒齋完議)」,「진제장지(賑濟場志)」,「서향약후(書鄕約後)」,「자모영정지(慈母影幀識)」, 「장천서원영건전말(長川書院營建顚末)」 등이 있다. 이 중 「업유재완의」는 향교의 학자금에 대한 규정을 밝힌 것이고, 「진제장지」는 명종 8년(1553)과 9년(1554)의 기근 구휼에 대한 것이다. 이 밖에「장천서원영건전말」에는 김안국(金安國)을 제향한 장천서원 건립의 전말이 실려 있다. 이 글은 초기 서원의 운영과 재정에 관한 좋은 연구자료이다.

◈형이 동생의 효행을 기록해준「효우록」
권2에 수록된 제문은 주로 김사걸(金士傑)과 조종돈(趙宗敦)에 대한 것이다. 권3에 수록된 「효우록」은 저자가 아버지 신수를 간병하고, 모친상을 당했을 때 행한 효행으로 효자문이 세워진 경과를 적은 것으로, 친형인 신원복(申元福)이 기록한 것이다. 또한 권3의「속삼강행실(續三綱行實)」과 「문소지」역시 효행에 대한 것으로, 「연친곡(宴親曲)」 8규(閨)를 지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권4의 「사우록」은 손자 신열도(申悅道)가 편찬하였는데, 저자의 사우 74인의 행적과 그들이 저자에게 준 시문이 들어 있다. 이황과 조식(曺植) 및 박운(朴雲), 주세붕, 김인후, 황준량(黃俊良) 등 당대 거유의 이름이 보인다.
권4의 말미에는 「회당선생분산도(悔堂先生墳山圖)」와 「신재주선생유묵(愼齋周先生遺墨)」 및 이상정(李象靖)의 「유묵발」이 새겨져 있다.
간역 :
『회당선생문집』은 조선 중기에 활동한 의성 출신의 학자 신원록의 문집을 그의 6대손 신정모(申正模) 등이 간행하였다. 하지만 문집의 구체적인 간행시기와 관련해서는 명확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즉, 권수에 수록된 연보 말미의 ‘영종대왕(英宗大王) 십육년(十六年) 경신삼월(庚申三月) 문집성(文集成)’이라는 표기가 있는데, 이에 근거했을 때 유고의 편집은 1740년에 일단락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권말에는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의 유묵(遺墨)과 영조 45년(1769년에 작성한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어서, 1769년에 문집의 간행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문집의 간행 시기는 일반적으로 서문이나 발문의 작성 연도와 일치한다. 다만, 간행 당시 서문과 발문을 완비하였더라도 곧바로 판각되지 못하는 사례도 있고, 문집의 편성이 일단락된 뒤 추가로 작품이나 내용이 더해지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문집의 일차적인 간행 연도는 서문과 발문의 작성 시기로 가름하지만, 본문에 수록된 작품들의 저술 연도 또한 필히 참고하여야 한다.
문집의 내용 중 권1에 수록된 선생의 연보(年譜) 내용 중에는 ‘영종(英宗)’이라는 표기를 쓰고 있어서, 실제 판각 시점은 영조 사후임을 알 수 있다.
자세히 보기
목판정보
결락정보 :
책판은 4권 분량의 목록 및 서발(序跋), 본문을 새긴 63판이 완질로 남아 있다. 다만, 권1의 제22/23장 등 일부는 마구리가 망가져 후대에 새로 제작하여 끼워 넣은 판이 있다.
형태적특징 :
책판은 판목이 제작된 시점인 18세기 후반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목판 본문의 체제는 사주쌍변(四周雙邊)의 광곽(匡郭)이며 서문을 새긴 3판은 5행 14자의 초서체 대자(大字)로 판각하였다.
본문은 10행에 20자를 배치하여 해서체(楷書體)로 새겼으며 본문의 군데군데에 쌍행(雙行)의 주(註)를 판각하였다. 모든 판에 계선(界線)을 판각하였으며, ‘悔堂集’이라는 화구제(花口題)를 새겨두었다.
판심에는 권차(卷次)와 ‘시(詩)’와 ‘서(書)’, ‘잡저(雜著)’ 등 소제목을 판각하였고, 아래 어미의 위에 판의 해당 장차를 배치하였다.
판심의 어미(魚尾)는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로 균일하다. 판수(板首)의 제목은 ‘悔堂先生文’으로 새겼다.

마구리를 제외한 판의 크기는 세로×가로가 21×55cm 내외로 비교적 고른 편이고, 반곽(半廓)의 크기는 세로×가로가 20×17cm로 거의 일정하다.
판목의 두께는 얇은 판은 1.6cm에서 두꺼운 판은 3.0cm에 달해 두 배 가까운 편차가 있다. 평균적인 판목의 두께는 2.0cm 내외로 비교적 두껍게 제작되었다. 이에 따라 책판의 무게 또한 적게는 1.7kg에서 많게는 2.8kg이 넘어서 비교적 차이가 크다. 평균적인 목판의 무게는 2.0kg내외로 제작되었다. 이러한 판목의 무게 차이는 판목을 재단할 때 연판자(鍊板者)가 재단을 달리하였거나 보관 환경에 따른 판목의 건조 상태나 습기에 노출된 정도가 달랐던 것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판목의 보존 상태는 전반적으로는 양호하지만, 일부 판에서는 판의 균열과 마구리의 균열 및 부식이 부분적으로 진행되었다.
판의 균열이 발생한 판은 권1의 제14/15장, 권3의 제25/26장 등이 있다. 그 외에는 부식이나 충해가 발생하지 않았는데, 판각 후 인쇄가 자주 있었기에 인쇄에 따른 자연 마모는 일어난 반면, 목판에 스며든 먹이 부식을 방지하고, 방충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권3의 제1/2장은 판면이 아닌 광곽 밖의 우측 하단 공간이 거칠게 패여 있다. 이는 보관상의 훼손이라기보다 연판자가 판면을 재단할 때 발생한 목판 제작시의 결함으로 보인다.
마구리의 균열이 발생한 판에는 권1의 연보를 새긴 제13/14장, 제23/24장, 권2의 제5/6장 등이 있고, 권2의 제7/8장, 권3의 제11/12장 등은 마구리의 부식이 일부 진행되었다.
일부 판에서는 본문을 새긴 판면의 뒤틀림이 발생하였다. 뒤틀림이 발생한 판은 권1의 연보 제5/6장, 제22/23장 등이 있다.
본문과 마구리를 결합할 때 결합부를 마름모 형태로 줄여서 고정 작업의 효율성을 도모하였고 나무못을 가운데에 한 개 또는 두 개를 박아 고정하는 방식으로 제작했다. 그리고 판면이 마구리의 좌우측에 고정되는 부분은 마구리를 끝까지 관통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마구리의 홈 크기와 본문 판이 결합되는 부분이 맞지 않아 흔들림이 발생할 경우, 마구리와 판면을 결합한 뒤 목심을 마구리의 좌우측 바깥 부분에서 끼우는 방식으로 보강하여 흔들림을 방지하였다.
마구리의 형태는 단면이 직사각형 또는 정사각형 형태로 크기도 비교적 균정한 편이며, 본문보다 3-5cm 내외로 크게 제작되어 본문을 새긴 판을 견고하게 지탱하고 있다.
그리고 판면의 좌우에는 공간이 어느 정도 확보된 반면, 판면의 상하에는 광곽의 크기와 거의 동일한 정도로 여백을 두지 않았다. 이러한 재단 방식은 다른 문집판에서도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인데, 목재를 절약하고, 인쇄할 때 먹을 낭비하지 않기 위함이다.

일부 판에서는 마구리의 각 면 여백에 문집명과 장차 및 판을 새긴 사람의 이름을 묵서하여 두었다. 마구리의 앞면이나 옆면에 묵서한 형태는 불규칙하다. 이러한 묵서 작업은 각수들이 직접 판의 앞면이나 옆면에 쓰기도 하고, 각수들의 임금 계산을 위해 판각 작업을 관할하였던 유사(儒士)들이 적은 기록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부 판에서는 묵서 기록이 없기도 하다. 목판에 쓰인 묵서 기록은 ‘회당집(悔堂集) 서(序) 삼사(三四) 득손(得孫)’ 등과 같다.
묵서 기록 중에서 판의 보관 과정 중 또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먹이 지워져 판독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마구리에 기록된 내용 중 판독 가능한 각수들의 참여 현황을 살펴보면, 서문 제3/4장은 ‘득손(得孫)’, 연보 제3/4장은 ‘원복(原卜)’, 연보 제7/8장은 승려 ‘상부(尙負)’, 연보 제11/12장은 ‘맹유(孟有)’, 연보 제15/16장은 ‘수욱(水旭)’, 연보 제17/18장은 ‘석득(碩得)’, 권2의 제13/14장은 ‘박효원(朴孝元)’, 권3의 제9/10장은 ‘맹유(孟有)’, 권3의 제19/20장은 ‘김종배(金宗[倍])’, 권3의 제29/30은 ‘득손(得孫)’ 등과 같다. 묵서 기록이 판독되는 인원이 8명이고, 이 밖에 9명은 이름을 써놓은 것으로 보이나 판독할 수 없다. 추정컨대 판각에 참여한 인원은 13-15명 내외로 여겨진다. 따라서 각수 1인당 5판 정도의 작업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전체 목판 중 단면으로 판각된 것은 권1의 연보 제21장을 새긴 판의 1판에 불과하다.
책판은 고로쇠나무로 제작되었다.
특이사항 :
『회당선생문집』은 다른 문집판들에 비해 마구리의 좌우 길이가 다르게 제작된 판들이 유난히 많다. 이를테면, 권1의 연보를 새긴 제5/6장, 제7/8장, 권 2의 제19/20장, 제22/23장, 권3의 제13/14장 등 여러 판의 마구리의 좌우 길이가 차이가 난다. 이 중 외형상 후대에 보수한 판은 극히 일부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렇게 길이 차이가 나는 판이라 하더라도 마구리의 두께나 목질은 동일한 것으로 드러난다. 이는 목판의 최초 제작 시부터 판목을 다듬고 재단하는 연판자(鍊板者)나 목수(木手)의 착오를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책판정보
구분 내용 수량
(1,2)(3,4)(5,6) 3
目錄 (卷4目錄-,總目-)(卷1目錄-1,卷1目錄-2)(卷2目錄-,卷3目錄-) 3
年譜 (1,2)(3,4)(5,6)(7,8)(9,10)(11,12)(13,14)(15,16)(17,18)(19,20)(21,空)(22,23) 12
卷1 (1,卷1目錄-3)(2,3)(4,5 )(6,7)(8,9)(10,11)(12,13)(14,15) 8
卷2 (1,2)(3,4)(5,6)(7,8)(9,10)(11,12)(13,14) 7
卷3 (1,2)(3,4)(5,6)(7,8)(9,10)(11,12)(13,14)(15,16)(17,18)(19,20)(21,22)(23,24)(25,26)(27,28)(29,30)(31,32) 16
卷4 (1,2)(3,4)(5,6)(7,8)(9,10)(11,12)(13,14)(15,16)(17,18)(19,20)(21,22) 11
遺墨跋 (1,2)(3,遺墨) 2
서지/해제 작성자 : 작성:임기영
윤문:박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