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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집(虎溪集)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호계(虎溪) 신적도(申適道, 1574~1663)의 시문집을 새긴 책판이다. 책판은 서문과 목록, 그리고 발문과 신돈식(申敦植)의 권말 지문(識文) 등이 누락 없이 완질로 남아 있다.
호계집(虎溪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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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자
    신적도(申適道)(저), 신상하·신돈식(申相夏·申敦植)(편)
    판심제
    虎溪集
  • 기탁처
    아주신씨 회당공파종중
    서문
    류필영(柳必永)(1913)
  • 발문
    신상하(申相夏)(1905)
    판각시기
    1919년
  • 완본수
    79
    현존수
    79
  • 결락수
    0
인물정보
• 신적도[申適道, 선조 7년(1574)- 현종 4년(1663)]

호계 신적도(申適道) 선생은 조선 중기 의성 출신의 선비이자 의병이다. 본관은 아주(鵝洲)이며 호는 호계(虎溪), 자는 사립(士立)이다. 아주 신씨 의성읍 파조(派祖) 신광부(申光富)의 후손이다. 조부는 관학교수(官學敎授) 신원록(申元祿)이고, 아버지는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와 선무랑(宣務郞)을 지낸 신흘(申仡)이다. 동생은 장령(掌令) 신달도(申達道), 장령 신열도(申悅道)이다. 슬하의 자식은 신연(申埏), 신탄(申坦), 신채(申埰), 신점(申坫)을 두었다.
유년기와 청년기에 그는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과도 교유하며 친분이 두터웠다. 어려서부터 효행과 학문이 뛰어 났으며 33세 되던 해인 선조 39년(1606)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에 진사 3등(三等) 8위로 입격하였다. 중앙관료가 되지 않고 향촌 선비로 지냈으나 의병활동으로 벼슬을 제수 받아 품계가 종사품(從四品)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이르렀다.

◈사림의 선비로써 양 호란에 두 번이나 의병을 일으키다
54세가 되던 인조 5년(1627)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공은 분연히 일어나면서 “임금님의 수레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왕업이 매우 위태로우니 이는 신하가 되어 초야에서 구차하게 살아갈 때가 아니다.”라며, 원근의 동지들과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병력을 이끌고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화의를 맺어 적이 물러간 뒤였다. 이후 어전에 상소를 올리자, 장한 일이란 비답(批答)을 받고 상운도찰방(祥雲道察訪)에 제수되었다.
병자호란(1636) 때에도 의성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오랑캐와 화친할 수 없으며, 이를 배척한다는 뜻에서 “척화하는 것이 당연한 일. 어찌 강화파들은 반대한단 말인가? 오랑캐가 겁나 두려워함이라. 망국꼴 보려는 왕손매의 심정이구나.” 라는 척화시(斥和詩)를 읊었고, 군사와 양곡을 나라에 바쳤다. 나라에서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의 벼슬을 내렸다.

◈채미헌을 짓고 은거하다
이후 경상북도 의성군 옥산면 금학리의 학소대라는 작은 골짜기에 ‘채미헌(採薇軒)’이라 편액을 단 초가집 몇 칸을 지어, 날마다 『춘추(春秋)』를 읽으며, 여생을 마감하였다. ‘채미헌’이라는 당호는 은나라가 망한 뒤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를 섬기지 않고 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오랑캐인 금나라와 화친한 조정을 섬길 수 없다는 의미이다. 당시 사람들이 소주(韶州) 숲 골짜기에 대명일월(大明日月)이 있다고 칭찬했다 한다.
죽은 뒤 철종 7년(1856), 지방유림이 뜻을 모아 동생 신열도와 함께 의성군 봉양면 분토리에 위치한 단구서원(丹丘書院)에 배향하였다. 그 뒤 고종 4년(1867)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증직(贈職)받았으나 단구서원은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년) 훼철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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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정보
구성 :
권1의 본문 시작에 앞서 문집의 목차에 해당하는 목록을 목판 5판에 10장 분량으로 판각하였다. 본문의 수록 내용으로 권1에 시(詩)와 소(疏), 서(書), 권2에 잡저 12편, 잠(箴) 2편, 명(銘) 2편, 제문 6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3과 권4에는 창의록(倡義錄)을 할당하여서 서(序), 지략(誌略), 통유일향사우문(通諭一鄕士友文), 통유도내문(通諭道內文), 창의목록(倡義目錄)을 수록하였다. 권5와 권6은 부록으로, 유사(遺事), 행장(行狀), 묘표(墓表), 묘갈명(墓碣銘), 읍지(邑誌), 봉안문(奉安文), 상향축문(常香祝文), 고묘문(告墓文), 사림통문(士林通文), 사우유찰(師友遺札), 제문(祭文), 만사(輓詞) 등이 수록되어 있다.

◈퇴계 이후 조선 성리학의 큰 학자
권1에 수록된 시는 가행시 형식의 뛰어난 작품들이 많은데「채미가(採薇歌)」·「학산구조(鶴山九操)」등의 작품이 잘 알려져 있다, 서(書)는 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 정경세(鄭經世), 이경석(李景奭), 정온(鄭蘊) 등 당대 명유들과 교유하며 쓴 글이다.
권2의 잡저 중 「성설(性說)」, 「심설(心說)」, 「심성정지의변(心性情志意辨)」, 「용학도후지(庸學圖後識)」, 「인의예지설(仁義禮智說)」, 「무극이태극설(無極而太極說)」, 「음양설(陰陽說)」, 「정의변(情意辨)」, 「지의변(志意辨)」 등이 수작으로 평가된다. 특히, 「성설(性說)」과 「심설(心說)」, 「심성정지의변(心性情志意辨)」등에서는 길을 성(性)으로, 길을 가는 사람을 마음(心)으로, 발을 움직여 길을 가는 것을 정(情)으로, 발을 움직여 길에 들어서는 것을 지(志)로, 길에 들어서 얼마를 갈 것인지를 헤아리는 것을 의(義)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설명 방식을 통하여 이황으로부터 확립된 조선 성리학의 입장에서 심학(心學)에 관한 연구가 보다 세밀화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무극이태극설(無極而太極說)」과 「음양설(陰陽說)」은 본체론에서의 형이상자와 형이하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글이다. 잠(箴)과 명(銘) 역시 「존양잠(存養箴)」, 「성찰잠(省察箴)」, 「동벽명(東壁銘)」, 「서벽명(西壁銘)」에서 보듯 심성수양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다.

◈척화(斥和)를 주창하고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의병활동을 기록하다
소문(疏文)은 「청파화의소(請罷和議疏)」, 「청척화소(請斥和疏)」등의 강상 의리를 근거로 명(明)과의 화친을 유지하고 청에 대항할 것을 주장한 글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청과의 화친을 반대했던 홍익한(洪翼漢),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의 삼학사를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는 비애를 묘사한 시 「송별삼학사(送別三學士)」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서애선생만(西厓先生輓)」,「한강선생만(寒岡先生輓)」,「여헌선생만(旅軒先生輓)」, 「만정우복(輓鄭愚伏)」등은 그의 학적 연원을 짐작하게 하는 글이다. 또한 권3에 수록된 「창의록」은 정묘호란 시절의 의병활동 기록이고, 권4에 수록된 글들은 병자호란 시절의 의병활동 기록으로 이 방면의 연구에 좋은 기초 자료가 되고 있다.

권말에는 도유협흡(屠維協洽(己未),1919)에 신돈식(申敦植)이 작성한 후지(後識)가 수록되어 있다. 이 후지(後識)의 기록에 따르면, 《호계선생유집(虎溪先生遺集)》은 전대부터 간행을 위해 노력해오다가 비로서 돈식(敦植)대에 이르러, 유문을 수습하여 정리하고 유필영(柳必永) 등에게 서문과 발문을 받아 1919년에 간행하였다고 하였다. 권말에는 신돈식의 후지와 1905년에 신상하(申相夏)가 작성한 발문도 수록되어 있다.
간역 :
『호계선생유집』은 호계(虎溪) 신적도(申適道, 1574~1663)의 시문집을 그의 후손 신상하(申相夏)와 신돈식(申敦植) 등이 간행하여 새긴 것이다. 권두에 유필영(柳必永)의 서문이 있는데, 소양적분약(昭陽赤奮若)이라 적혀있다. 고간지(古干支)이므로 계축(癸丑)년(1913년)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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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정보
결락정보 :
책판은 6권 분량의 목록 및 서발(序跋), 본문을 새긴 79판이 완질로 남아 있다. 이 밖에 책판의 누락은 없지만 권6의 제25장은 한 쪽 면의 절반 이상이 훼손 및 마멸되어 내용 판독이 불가능하다. 이는 보관상의 부실이라기보다 고의적인 훼손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형태적특징 :
책판의 보존 상태는 전반적으로 양호한 편이며, 사주쌍변(四周雙邊)의 광곽(匡郭) 안에 본문을 해서(楷書)체로 새겼다. 문집판은 서문과 목록 및 본문의 권1에서 권6에 이르기까지 모든 내용이 누락 없이 79판 완질로 남아 있다.

본문의 판각 체제는 모든 자수의 기본틀을 10행에 18자로 일정하게 유지하였다. 모든 판에 계선(界線)을 판각하였으며, 아래위 백구(白口)에 판심의 어미는 위쪽 어미는 상하향이엽화문어미(上下向二葉花紋魚尾)로, 아래쪽 어미는 하상향일엽화문어미(下上向一葉花紋魚尾)로 일정하게 새겼다.
판수(板首)의 제목은 ‘虎溪先生遺集’이고, 판심제는 줄여서 ‘虎溪集’으로 판각하였다. 판심제의 아래에는 해당 목판의 장차를 새겨두었다.

판목의 크기는, 마구리를 제외한 판의 크기는 세로×가로가 18×45cm 내외로 비교적 고른 편이고, 반곽(半廓)의 크기는 세로×가로가 18×16cm로 거의 일정하다.
반면, 판목의 두께는 얇은 판은 1.1cm에서 두꺼운 판은 3.0cm에 달해 2cm 가까운 편차가 보일 정도로 두께의 드나듦이 큰 편이며 평균적인 두께는 2cm 내외로 제작되었다. 이에 따라 책판의 무게 또한 적게는 590g에서 많게는 1.5kg이 넘어서 비교적 차이가 크다. 평균적인 목판의 무게는 1.0kg에서 1.1kg내외이다. 이러한 판목의 무게 차이는 판목을 재단할 때 연판자(鍊板者)가 재단을 달리하였거나 보관 환경에 따른 판목의 건조 상태나 습기에 노출된 정도가 달랐던 것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판목의 보존 상태는 전반적으로는 양호하지만, 일부 판에서는 판의 균열과 마구리의 균열 및 부식이 진행되었다.
판의 균열이 발생한 판은 권4의 제5/6장, 권5의 제15/16장, 권6의 제9/10장, 권6의 제13/14장, 권6의 제15/16장 등이 있다. 특히 권6의 제17/18장은 좌우로 완전히 갈라져서 마구리로 판을 지탱하고 있다. 또한 단면 판각된 권6의 마지막 장도 가로로 길게 균열이 발생하였다. 좌우의 마구리가 없으므로 보관 시 각별히 유의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더불어 권1의 제25/26장은 판의 앞면과 뒷면 모두 갈라짐 현상이 발생하였고, 판목이 얇게 재단된 탓인지 단면 판각된 두 판을 겹쳐 좌우에 마구리로 고정하여 하나의 목판으로 완성하였다. 이러한 목판 제작 방식은 연판자나 각수의 실수로 인한 것으로 목판 제작 시 가끔 보이는 형태이다.
본문을 새긴 판에서 충해나 누습으로 인한 판의 부식은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또한 마구리의 균열이 발생한 판으로는 권4의 제9/10장, 권2의 제9/10장, 권5의 제11/12장 등이 있고, 마구리의 부식이 진행된 판은 권3의 제13/14장, 권5의 제13/14장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일부 판에서는 본문을 새긴 판면의 뒤틀림이 발생하였다. 뒤틀림이 발생한 판은 권1의 목록을 새긴 제1/2장을 비롯하여, 권1의 제13/14장 등이 있다.
책판 제작 시 마구리와 본문을 새긴 판의 결합 형태는 쇠못을 마구리와 결합하는 가운데에 한 개 또는 두 개를 관통시켜 고정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판면이 마구리에 고정되는 부분은 마구리의 좌우측 끝까지 관통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구리의 홈 크기와 본문 판이 결합되는 부분이 맞지 않아 흔들림이 발생할 경우, 마구리와 판면을 결합한 뒤 목심을 마구리의 좌우측 바깥 부분에서 끼우는 방식으로 보강하여 흔들림을 방지하였다.
마구리의 형태는 단면이 직사각형 또는 정사각형 형태로 크기도 비교적 균정한 편이며, 본문보다 3-5cm 내외로 크게 제작되어 판을 견고하게 지탱하고 있다.
또한 본문을 새긴 판면과 마구리의 결합 부분은 마름모 형태로 줄여서 고정 작업의 효율성을 도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판면의 좌우에는 공간이 어느 정도 확보된 반면, 판면의 상하는 광곽의 크기와 거의 동일한 정도로 여백을 두지 않았다. 이러한 재단 방식은 다른 문집판에서도 보이는 공통적인 현상으로, 목재를 절약하기 위한 의도와 인출시 먹의 낭비도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판면을 기준으로 마구리의 좌우면에는 문집명과 책판이 해당하는 권수, 장차를 묵서(墨書)해 두었다. 이를테면 ‘호집(虎集) 권일(卷一) 구장(九丈) 십장(十丈)’ 또는 ‘호집(虎集) 권이(卷二) 칠장(七丈) 팔장(八丈)’ 등과 같다. 다른 문집판의 경우 각수명을 묵서로 기입한 사례가 많은 반면, 호계집에는 어떠한 각수 기록도 없다.
그 외 본문을 새긴 판면의 글자 마모 정도와 뭍은 먹의 흔적으로 볼 때, 인출 회수가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판각한 시점에 비하여 글자의 마멸이 다소 발생하였고, 마구리와 판면의 결합 공간까지 먹이 스며들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남아있는 목판 중 권1의 제13/14장의 경우처럼 처음 재단시에는 편평하게 재단되었다 하더라도, 인쇄가 거듭되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 글자면을 비롯하여 판목이 휘거나 심하게 뒤틀린 사례도 종종 나타난다. 이러한 뒤틀림 현상은 판목이 건조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 열화(劣化)의 한 형태이기도 하고, 잦은 인출에 따라 먹물을 머금어 발생한 인위적인 영향으로 발생하기도 한다.
전존하는 목판 중 단면으로 판각된 것은 권말의 지문(識文)을 새긴 제1장의 한 판에 불과하다. 책판은 감나무로 제작되었다.
특이사항 :
이 문집판은 보존 및 관리 중에 마구리가 결락된 판에 대하여 보수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특기할 점으로 판면과 마구리의 결합 방식은 쇠못으로 가운데 한 곳 또는 두 곳을 못질하여 쇠못을 관통시켜 고정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하지만 이로 말미암아 쇠못이 관통한 곳에서 비롯된 목판의 갈라짐 현상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마구리 또한 쇠못을 친 곳에서 비롯된 균열이 자주 보인다. 이는 나무못을 사용하는 것에 비하여 더 현저하게 발생하였던 바, 목판 제작시 편리함이 따른 반면 보관상 불리한 점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한편, 권5의 제15/16장을 새긴 판은 판 전체에 걸쳐 좌우로 커다란 갈라짐 현상이 발생하였으며, 이는 제15장의 제1행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부분은 자연 열화에 의한 균열이라기보다 판목 보관상 부딪힘으로 인하여 제1행의 5글자 부분이 깊이 패이면서 판목 전체로 균열이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본문의 마지막 장에 해당하는 신돈식(申敦植)의 지문(識文)을 새긴 판은 단면으로 판각되어 있고, 판의 뒷부분은 계선만 새겨둔 계선판(界線板)이다. 이 판목은 그 크기 또한 가로 길이가 60cm가 넘어 다른 판에 비하여 15cm 이상 크게 제작되었으며, 양쪽에 마구리도 부착되어 있지 않다. 다른 판들과 달리 후대에 새로 판각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책판정보
구분 내용 수량
(1,2) 1
目錄 (卷1目錄 -1,卷1目錄 -2)(卷1目錄 -3,卷1目錄 -4)(卷2目錄-5,卷2目錄-6)(卷3目錄-1,卷4目錄-2)(卷5目錄-1,卷6目錄-2) 5
卷1 (1,2)(3,4)(5,6)(7,8)(9,10)(11,12)(13,14)(15,16)(17,18)(19,20)(21,22)(23,24)(25,26) 13
卷2 (1,2)(3,4)(5,6)(7,8)(9,10)(11,12)(13,14)(15,16)(17,18) 9
卷3 (1,2)(3,4)(5,6)(7,8)(9,10)(11,12)(13,14)(15,16)(17,18) 9
卷4 (1,2)(3,4)(5,6)(7,8)(9,10)(11,12)(13,14)(15,16)(17,18)(19,20)(21,22)(23,24)(25,26)(27,28)(29,卷3-19) 15
卷5 (1,2)(3,6)(4,5)(7,8)(9,10)(11,12)(13,14)(15,16)(17,18)(19,20)(21,22)(23,24)(25,26) 13
卷6 (1,2)(3,4)(5,6)(7,8)(9,10)(11,12)(13,14)(15,16)(17,18)(19,20)(21,22)(23,24)(25,空) 13
卷6終 (1,空) 1
서지/해제 작성자 : 작성:임기영
윤문:박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