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한국국학진흥원
ENGLISH알림마당
Home> 목판아카이브> 순천김씨 동리공파종중 > 동리선생문집

동리선생문집(東籬先生文集)

조선 중기의 문신인 동리(東籬) 김윤안(金允安, 1560-1622)의 시문집을 새긴 책판이다. 책판은 서문과 세계도, 연보와 발문 등을 새긴 전체 3책 5권 분량이며 서문과 발문 및 본문 등에서 여러 판이 결락되어 현재 86판만이 남아 있다.
동리선생문집(東籬先生文集)

1  /  86

  • 저자
    김윤안(金允安)(저), 이상정·김세규·김세유(李象靖·金世奎·金世瑜)(편)
    판심제
    東籬先生文集
  • 기탁처
    순천김씨 동리공파종중
    서문
    이상정(李象靖)(1773)
  • 발문
    김굉(金㙆)(1811)
    판각시기
    1812년
  • 완본수
    95
    현존수
    86
  • 결락수
    9
인물정보
• 김윤안[金允安, 명종 17년(1562)-광해군 14년(1622)]

◈서애 류성룡 문하에서 수학
동리 김윤안 선생은 16세기 말 선조 조에 활동한 문신이다. 안동시 풍산읍에서 태어났으며, 27세 되던 해인 선조 21년(1588) 생원․진사시에 동시에 합격하면서 벼슬길에 입문하였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字)는 이정(而靜), 호는 동리(東籬)이다. 할아버지는 자순(自順)이고, 아버지는 현감을 지냈고 사후 건공장군(建功將軍)에 추증된 박(博)이며, 어머니는 진성이씨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셋째 형인 이의(李漪)의 딸이다.
문집에 수록된 연보에 따르면, 퇴계 이황, 서애(西涯) 류성룡(柳成龍)으로 이어지는 남인계 문인이다. 장현광, 김성일, 정구 등과도 사승 관계에 있으면서 끊임없이 교유한 기록이 보인다. 류성룡의 옥연서당(玉淵書堂)과도 인연이 깊다. 과거 합격 이전에도 문장이 빼어나, 주변 문인들의 제문(祭文) 등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선조 22년(1589)에는 이정(李楨, 1512-1571)의 사우(祀宇)가 완공되자 직접 상량문을 써주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시절, 의병으로 항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상주목사 김해(金澥, 1534-1593) 휘하에서 형인 김윤명(金允明)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항전하였다. 안동의진(安東義陣)이라 불리며, 한때 상주성을 탈환하기도 하였다.
선조 32년(1599) 40세에는 여인의 규범을 정리한 ≪『여범(女範)』≫을 지어 딸에게 주었는데, 후덕(厚德)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선조 37년(1604)에는 생원이지만 상소를 올려 오현(五賢)을 문묘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다. 선조(宣祖)는 그 중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사적에 미심쩍음 많아 부당하다는 전교를 내렸다.
51세에 과거 급제
지역에서 학문이 깊은 선비로 명성이 높아 여러 벼슬을 했다. 선조 38년(1605) 소촌도(召村道) 찰방(察訪)에 천거되었다. 임진왜란으로 황폐해진 역로(驛路)와 해이해진 역졸들의 기강을 회복시키는 데 전력하였다. 늦은 나이인 광해군 4년(1612) 51세로 증광문과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을 제수 받고 품계가 당상관인 정3품 통정대부로 승진하였다. 1613년에 대구부사(大丘府使)를 제수 받아 탐학한 관기를 바로 잡고 백성을 교화하는 데 힘썼다. 정온(鄭薀, 1569-1641)이 영창대군 피살의 부당함을 주장하다가 제주로 유배될 때에는 시(詩)를 지어 위문하기도 하였다.
사후에는 류성룡의 형인 류운룡을 주향으로 하는 화천서원(花川書院, 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광덕리 소재)에 배향되었다.
자세히 보기
문집정보
구성 :
제1책의 권1에는 서문과 세계도(世系圖), 연보(年譜) 및 시(詩) 90수가 수록되어 있다. 제2책의 권2에는 시(詩) 104수와 권3에는 소(疏) 3건이 수록되어 있다. 제3책의 권4에는 서(書) 18수와 기(記) 2수, 제문(祭文) 11건과 잡저(雜著) 3건이 수록되었다.

◈외손봉사의 명분을 주장한 글 「월암재사중창문」
권4의 말미에는 「월암재사중창문」(月庵齋舍重創文)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작품은 김윤안이 월암산(月庵山)에 있는 권집경(權執經)의 묘소를 수리하고 재사(齋舍)를 중창하면서 선조 33년(1600)에 지었다. 권집경은 상주목사로 안동 구담촌에 정착하였는데, 이때 순천김씨 김승주(金承霔)의 맏아들 예조참의(禮曹參議) 김유온(金有溫)이 권집경의 외동딸과 혼인하며 같은 마을에 살기 시작했다. 그 후 후사가 없는 외선조 권집경의 묘소를 순천김씨 가문이 봉사하게 되었다. 글에 따르면, 사람은 어머니 없이 태어날 수 없으므로 어머니의 할아버지도 자신의 할아버지라고 강조한다. 구담(九潭)은 큰 고을로 평양김씨(平陽金氏)와 완산이씨(完山李氏), 광성김씨(光城金氏), 광릉이씨(廣陵李氏)의 사성(四姓)이 있는데 모두 김유온의 후예이니 권집경은 사성(四姓)의 개기지조(開基之祖)라 하였다. 월암재의 중창 경위를 밝히며, 도순찰사(都巡察使) 상공(相公)이 쌀과 소금을 보태었고, 특히 이 해에 풍년이 들어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손자 김여만이 김윤안의 글을 모으며「행장」을 짓다
제3책의 후반부에는 권5가 함께 편성되어 있는데, 권5는 문집의 부록에 해당한다. 권5의 내용은 행장(行狀)과 묘갈명(墓碣銘), 제문(祭文), 만시(輓詩), 화천추향봉안문(花川追享奉安文) 및 발문(跋文)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행장」(行狀)은 김여만이 지은 것으로 행장을 지은 동기에 대해서 밝혀두었다. 일찍이 자신의 아버지 김기후(金基厚)가 김윤안의 언행록(言行錄)을 베껴 두었으나, 완성을 보지 못했음이 안타까웠는데, 그 뒤 여러 번 상화(喪禍)를 겪어 본고(本稿)를 잃게 되자 표형(表兄)이었던 이유장(李惟樟) 등과 함께 구문약기(舊聞略記)를 모아 수습하여 지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화천추향봉안문」(花川追享奉安文)과 「발문」(跋文)은 김굉이 작성한 것으로 김윤안을 순조 11년(1811) 화천서원에 추향하면서 지은 것이다. 또한 발문에는 김세규 등이 문집을 교정하고, 책을 간행하게 된 경위를 비교적 소상히 밝혀두었다.
간역 :
『동리선생문집』의 편찬 및 간역의 시작은 김윤안의 손자 김여만(金如萬)이 행장(行狀)을 지으면서 일차적으로 정리되었다. 그 후 5대손 김반(金槃)이 유고의 일부를 수습하여 영조 49년 (1773), 이상정(李象靖, 1711~1781)에게 편집을 부탁하고 서문을 받아, 문집의 골격을 완성하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간행되지 못하였으며, 7대손인 김세규(金世奎)와 김세유(金世瑜)가 교정하고, 김굉(金㙆, 1739~1816)이 순조 11년(1811) 발문을 작성하여 간행되었다.
김굉의 발문에 따르면, 김윤안의 후손인 기산공(箕山公)의 집에 불이 나서 문집의 상당 부분이 소실되고, 일부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정리하여 간행하게 되었고, 간행 당시 문집의 분량은 5권 3책으로 편성되었다.
자세히 보기
목판정보
결락정보 :
전체 3책 5권 분량 중 세계도, 본문 등에서 여러 결락이 발생하여 현재에는 총 86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결락이 발생한 판은 세계도 5, 7장, 권1의 3/4, 7/8장, 권2의 21/22, 39/40장, 권4의 25, 32장, 권5의 5/6, 9/10장이다 이 밖에 책판의 누락은 없지만 권1의 세계도를 새긴 제3장의 경우처럼 계선과 본문을 새긴 뒤 오각으로 인하여 한 면 전체를 불용(不用) 처리하여 인위적으로 훼손한 판이 있다.
형태적특징 :
책판의 보존 상태는 전반적으로 양호한 편이며, 사주쌍변(四周雙邊)의 광곽(匡郭) 안에 본문은 해서(楷書)로 새겼고, 서문과 발문은 행초(行草)로 새겼다. 본문판은 권1에서 권5에 이르기까지 모든 내용이 누락 없이 86판 완질로 남아 있다.
본문의 판각 체제는 서문과 발문은 대자(大字)로 새겼고, 서발(序跋)의 기본틀은 6행에 한 행에는 11자에서 13자까지 판각하여 약간의 드나듦이 있다. 본문은 10행 20자를 기본으로 하고, 전체 본문에 걸쳐 계선(界線)을 판각하였다. 판심의 양식은 아래위 백구(白口)에 어미(魚尾)는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로 균일하나, 권3의 제12장의 경우처럼 아래 어미를 새기지 않은 판도 있다.
판수(板首)의 제목은 ‘東籬先生文集’이고, 판심의 제목도 동일하다.

마구리를 제외한 판의 크기는 세로×가로가 20×50cm 내외로 비교적 고른 편이고, 반곽(半廓)의 크기는 세로×가로가 19×17cm로 거의 일정하다.
반면, 판목의 두께는 얇은 판은 1.5cm에서 두꺼운 판은 3.8cm에 달해 2cm 이상의 편차가 발생하여 두께의 드나듦이 큰 편이다. 평균적인 두께는 2cm 내외로 제작되었다. 이에 따라 책판의 무게 또한 적게는 1.6kg에서 많게는 2.8kg이 넘어서 비교적 차이가 크다. 평균적인 목판의 무게는 2.2kg에서 2.5kg 내외이다. 이러한 판목의 무게 차이는 판목을 재단할 때 연판자(鍊板者)가 소홀했거나, 판을 새기는 과정 중 각수의 실수로 인하여 두 판을 겹쳐 사용한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판목의 보존 상태는 전반적으로는 양호하며 본문을 새긴 판에서는 충해나 누습으로 인한 판의 부식이 거의 진행되지 않았으나 일부 판에서는 판의 균열과 마구리의 균열 및 부식이 진행되었다. 목판의 균열이 발생한 판은 권5의 제1/2장, 권5의 제15/16장, 권5의 제17/18장, 서문의 제5장, 권4의 제18/19장 등이 있고 뒤틀림이 발생한 판은 권2의 제6/7장, 권3의 제9/10장, 권4의 제2/3장 등이 있다.
마구리 쪽을 보면, 균열이 발생한 판은 서문의 제1/2장, 세계도 제1/2장, 연보 제15/16장 등이 있고, 부식이 진행된 판으로는 서문의 제3/4장, 목록 제1/2장, 목록 제3/4장, 권2의 제6/7장, 권3의 제3/8장 등이 보인다. 또한 마구리를 후대에 보수한 판은 세계도 제1장, 세계도 제4/6장 등 다수가 보인다.
이외에도 마구리의 형태와 묵서 기록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책판 제작 시 마구리와 본문을 새긴 판의 결합 형태는 나무못, 즉 목심을 가운데에 한 개 또는 두 개를 관통시켜 고정하는 방식으로 제작하였다. 그리고 판면이 마구리에 고정되는 부분은 마구리의 좌우측 끝까지 관통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구리의 홈 크기와 본문판이 결합되는 부분이 맞지 않아 흔들림이 발생할 경우, 마구리와 판면을 결합한 뒤 목심을 마구리의 좌우측 바깥 부분에서 끼우는 방식으로 보강하여 흔들림을 방지하였다.
마구리의 형태는 단면이 직사각형 또는 정사각형 형태로 크기도 비교적 균정한 편이며, 본문보다 5cm 내외로 크게 제작되어 본문을 새긴 판을 견고하게 지탱하고 있다. 그리고 마구리의 앞면이나 바깥쪽에는 문집명과 책판이 해당하는 장차 및 판을 새긴 각수의 이름을 묵서(墨書)해 두었다.

묵서 기록의 일부는 지워지거나 오래 되어 모든 내용이 온전히 파악되지는 않는 부분도 있다. 또 일부 판들은 진흙이 묻어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흔적이 보이고, 묵서의 상당 부분이 가려 판독되지 않으나 일부 목판의 마구리에 쓰여진 묵서 중에는 각수로 참여한 사람의 인명이 드러난다.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권1의 서문 제1/2장을 새긴 사람은 ‘선득(先得)’, 서문의 제3/4장은 ‘성윤(性允)’, 서문의 제5장은 ‘정복(正福)’, 세계도 제1/2장은 ‘윤재(允才)’, 연보의 제13/14장은 ‘응청(應淸)’, 연보의 제15/16장은 ‘성윤(聖允)’, 목록 제3/4장은 ‘덕문(德文)’, 목록 제7/8장은 ‘명숙(明淑)’, 권2의 제7/8장은 ‘보경(寶敬)’, 권2의 제15/16장은 ‘덕인(德仁)’, 권2의 제17/18장은 ‘취백(取白)’, 권2의 제37/38장은 ‘득손(得孫)’ 등 묵서로 표기된 인원 중 판독되는 사람은 대략 16명 내외이다. 전체 목판의 분량이 86장임을 감안하면, 한 사람당 5장 내외를 판각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동리선생문집』판의 판각 작업은 실무적인 차원에서 판각 인원을 비교적 많이 동원하여 간역 작업의 신속성을 도모하였던 사례로 여겨진다.
이 밖에도 남아있는 목판 중 권4의 제2/3장의 경우처럼 처음 재단시에는 편평하게 재단되었다 하더라도, 보존과 관리 소홀로 인하여 새긴 글자면을 비롯하여 판목이 휘거나 심하게 뒤틀린 사례도 종종 나타난다. 이는 곧 판목을 새기고 인출한 뒤, 판의 보관 환경이 열악하였던 사실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전존하는 목판 중 단면으로 판각된 것은 세계도의 제3장, 서문의 제5장, 세계도의 제8장, 권3의 제11장, 권3의 제12장, 발문의 제5장의 모두 6판이다. 책판은 박달나무를 사용하여 제작하였다.
특이사항 :
이 문집판은 보존 및 관리 중에 마구리가 결락된 판을 보수하였다. 이는 마구리의 목질 및 재단 상태, 그리고 원판이 나무못을 사용한데 반해 보수한 것은 쇠못을 사용한 흔적이 있어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다만, 보수전의 원판과 비교하여 못을 박는 위치와 마구리의 관통 크기가 최대한 동일하도록 제작하였다.

한편, 전존하는 판목 중 목판본의 교정 방식에 대한 좋은 사례가 보인다. 즉, 권1의 연보(年譜)를 새긴 판의 제4장 제6행에는 소자쌍행(小字雙行)의 주(註)를 새겼는데, 새길 당시의 오각으로 인하여 교정을 본 뒤에는 ‘상장제정일준(喪葬祭鄭一遵...)’의 2행 14자 분량을 통째로 파내고 새롭게 문구를 새겨 끼워 넣었다. 이는 목판본의 다양한 교정 사례 중 구문 삽입에 해당하는 전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권1의 연보 제3/4장을 새긴 이 판은 본문을 재단한 나무가 얇은 탓에 단면으로 판각한 두 판을 덧대어 양쪽에 마구리를 끼워 한 판으로 완성하였다. 이러한 사례는 판목을 절약하기 위한 의도라기보다 판목 재단의 실수로 얇게 재단한 데에서 기인하였거나 오각에 따라 한쪽 면을 불용 처리한 것에서 비롯된 판목 활용의 한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례는 단면 판각한 권3의 제11장의 제8-9행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두 행에 걸친 모든 내용을 파내어 삭제하고, 새로운 내용을 파낸 크기에 맞게 다시 새겨 판목에 끼워 넣었다.
책판정보
구분 내용 수량
(1,2)(3,4)(5,空) 3
世系圖 (1,2)(3,空)(4,6)(8,空) 4
年譜 (1,2)(3,4)(5,6)(7,8)(9,10)(11,12)(13,14)(15,16) 8
目錄 (1,2)(3,4)(5,6)(7,8)(9,10)(11,12)(13,14)(15,16)(17,18) 9
卷1 (1,2)(5,6)(9,10)(11,12)(13,14)(15,16)(17,18) 7
卷2 (1,2)(3,4)(5,6)(7,8)(9,10)(11,12)(13,14)(15,16)(17,18)(19,20)(23,24)(25,26)(27,28)(29,30)(31,32)(33,34)(35,36)(37,38)(41,42)(43,卷3-1) 20
卷3 (3,8)(4,5)(6,7)(9,10)(11,空)(12,空)(13,14)(15,卷5-19) 8
卷4 (1,卷3-2)(2,3)(4,5)(6,7)(8,9)(10,11)(12,13)(14,15)(16,17)(18,19)(20,35)(21,22)(23,31)(24,34)(26,27)(28,29)(30,33) 17
卷5 (1,2)(3,4)(7,8)(11,12)(13,14)(15,16)(17,18) 7
(1,2)(3,4)(5,空) 3
서지/해제 작성자 : 작성:임기영
윤문:박상준